방과 후 백신
새로 부임한 교장 선생님은 속된말로 정말 난놈 이었다.
165정도 되어보이는 키에 안경 너머로 맑은 눈빛을 한 그는 교장실로 아이들을 하나 둘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상담 차원도 아니고, 넌 어떤 아이니? 개인적인 궁금증 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쉬는시간 마다 자연스레 열린 교장실 안으로 들어가 멋진 소파에 앉아 간식도 먹으며
자기들의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첫째와 둘째도 처음엔 '교장 선생님이 이상하다'고 표현했지만, 학교에 다녀오고 나서부터는
'오늘은 교장 선생님이랑 어떤 얘기를 했냐면요~' 하며, 마음 그릇이 넓어지는 것이 보였다.
교장실 앞, 표지판에는 늘 질문이 적혀있었다.
교장선생님의 질문이었다.
"얘들아, 운동장에 잡초를 좀 더 쉽게 뽑을 방법이 없을까?"
이런걸 적어두면, 아이들이 와서 답을 해주거나, 손수 댓글을 다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그는 학생들과 함께 이 작은 학교를 지킬 방법을 모색했던것 같다.
그당시 나는 '태권도 방과 후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은 자주 문 앞에서 내 수업을
훔쳐보듯이 보고 가셨던것 같다. 다른 눈치는 없어도, 그런 눈치 하나는 빨랐던 나는 교장선생님이 몰래와서
볼때를 기다렸다가 문을 확 열어 젖혔다.
적잖이 놀란 눈빛이셨는데,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자 조심히 들어오시는 교장쌤.
우리는 도복을 갖춰입고, 전방을 향해 함성! 으아!! 소리도 지르고, 같이 몸통에 발차기도 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반 태권도장 이었다면 품새를 외우고, 격식에 맞춰 했어야 하나
나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스트레스 풀자'
교장선생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돌아갔고, 그 후로도 자주 안으로 들어와 아이들을 살폈다.
역시, 좀 다른 사람인가? 이전 교장보다 더 나은 사람인것 같기도 하고...
의심을 거두고,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확정지을 찰나, 그는 교장실에서 띵까띵까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작은 학교라고 무시하는 거다! 학교에 와서 색소폰이나 불고...
어이구? 이젠 아예 운동장 창고를 개조해서 음악실로 만들더니, 저건 노래방 기계 아니야?
진짜 별꼴이네? 생각할 즈음, 아이들은 집으로 플룻을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이게 뭐야?"
"교장 선생님이 플룻을 주셨어요"
"왜?"
"이제 매일 쉬는 시간 마다, 교장 선생님하고 협주를 해야 하거든요"
교장 선생님은 지역의 노인회와 농협의 조합장 등등을 찾아가 플룻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지원받은 플룻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대여해주고, 오늘은 '도레미' 내일은 '파솔라시' 까지 불게 하며 자신과
언젠가 협주를 하자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 일까?
그해, 1년을 덜 채운 12월의 어느날, 학교는 학부모를 초대해 공연을 열었는데 아이들은 엉성하게 플룻을
불고 있었다.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분명 플룻을 손에 든 모습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고, 더 재밌었던 것은
아이들 뿐 아니라 전 교직원의 손에도 플룻이 들려 있었다는 거였다.
누군가의 카혼(두드리는 상자악기)으로 시작된 음악은 플룻과 색소폰, 그리고 전자드럼 등이 함께 들어오며
아름다운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교장 선생님은 이 학교에서 전교생이 음악을 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음악이 있는 곳 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다며 그렇게 1년, 2년, 3년차에는 전교생이 플룻 대회를 나가기 까지
했으니- 온마을 앙상블을 만들어, 이젠 아이들과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모여 공연을 선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에 울컥 .. 눈물이 났다.
사라져가는 마을, 그리고 학교.
아이들은 점차 시내로 빠지고 30명의 전교생은 25명으로 그리고 17명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노력에도 폐교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분교가 되거나, 옆 학교로 흡수되는 방법 뿐이었고, 그리 되면 아이들 앞으로는 천만원 정도의 돈이
나오는데 그 돈이 옆학교의 지원금으로 간다고 했다.
어쩐지.. 아이들이 팔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폐교를 막기위해 우리 부부도 참 많은 일을 했던것 같다.
지역의 음악가들을 모아 공연도하고, 다양한 수업을 하며 '시골 학교지만 이런것도 한다'는 홍보도 했다.
잊혀지지 않는 학교가 되어야만 했다.
그해 내가 했던 일은 시에서 하는 글짓기 대회에 아이들을 모두 내보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모두에게 쓰고 싶은 글을 한 바닥 쓰게 하고, 그 중 좋은 글을 10개정도 추려 산문과 운문 대회에 내보냈다.
아이들과 함께 했던 글쓰기 이야기는 다음편에 해볼 생각인데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10편 중에 6편이 수상을 해냈다. 그중 둘째 아이가 2등을 하며 시에서도 '그 학교가 대체 어디야?' 집중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우리는 잊혀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폐교는 거의 확정이 었다.
25년도가 지나고 나면, 이제 결정을 해야만 했다.
내년에 입학하는 학생은 고작 한명.
어떤 방법도 없는 이 벼랑끝의 상황에서도 교장선생님은 아이들과 플룻을 들고 대회에 나가 무대에서 호소했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어디까지 날아가 닿았을까.
아이의 졸업식 날, 교장 선생님은 맑게 웃으며 '그래도 내년에는 볼 수 있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플룻 대회를 보고, 감동한 시내의 학부모들이 시골로 전학을 시키겠다고 한 것!
그렇게 26년도에 1학년 4명이 들어오게 되면서, 우리 학교에는 '교감선생님'이 생기게 된다. ㅎㅎ
이것은 음악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음악에 실린 그의 간절함 이었을까.
졸업식에서 모든 학부모와 교직원 아이들이 눈물을 쏟는 광경이란...
방송국 놈들이 이걸 봤어야 하는데, 전국에 방영되었어야 할 귀중한 장면을 눈으로만 보아야 하니 서글펐다.
가장 다행 인것은 옆 학교로 흡수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옆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작년에 뉴스에 크게 났던 사람이었다. 학교 공금으로 해외에 골프치러 온가족이 갔다는 그런 뉴스... 횡령은 기본이고, 학교 운동부에서는 성폭행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운동부가 폐지되었다.
그런 곳에 우리 아이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
어른들은 아마도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우리 학교에는 100년이 넘은 나무가 3그루가 있다.
그 가운데 있는 나무를 어쩔 수 없이 병해충의 문제로 잘라내었는데, 어느날 학교에 가보니 무덤 처럼 보이는 것이 운동장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에게 '이게 뭐냐?' 물으니, 나무의 무덤이라고 했다.
나무의 무덤이라니... 그런 소린 처음이다.
교장 선생님은 나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잘라낸 자리를 덮고 꽃을 심어주자고 했다고 했다.
그렇게 그루터기 채로 남지 않고, 예쁜 나무무덤을 갖게 된 둔턱 위로 계절마다 꽃이 심어지고 있다.
그는 어떻게 그런 멋진 어른으로 자라,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아이들을 자신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한걸음 한걸음 얼마나 소중하게 걸어갔을까.
나의 진흙탕 같은 발자취를 되돌아 보게 된다.
교장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무대에서 말했다.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음악가 입니다.
언젠가 모든것이 사라지겠지만, 오늘의 음악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강당을 울리는 플룻소리.
교직원과 학생들의 앙상블.
그 간절함의 소리가 봄바람에 날아가 더 많은 이의 심장에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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