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코스 종점을 오전 10시에 도착하고 16코스로 들어섰다. 서장훈 광고 사진이 걸려있는 작고 비좁은 식당에서 보리비빔밥을 먹었다. 열 자리도 안된 작은 식당이지만, TV 프로에 나온 후 유명세를 탄 모양이다. 천장, 사방 벽, 기둥, 냉장고 문까지 식객들이 빼곡하게 메모를 남겼다.
이쁜이 표현이 많은데, 여성들이 자기를 애타게 희망하는 모습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에 이어 해병대가 4대 종교라는 낙서가 기억에 남는다.
밥을 먹다 울컥한 감정이 일었다.
갑자기 편안한 왕궁을 자진해서 버리고 위험한 인도 북부 정글로 들어간 부처가 생각났다. 사실 나는 천주교 세례를 받았지만, 철학적으로 불교에 젖어 있다.
싯다르타는 왜 부친 늙은 숫도다나 왕과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지난 아들 라후라, 그리고 예쁜 아내 야쇼다라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야간 도주했을까?
생로병사에 대한 호기심이 그토록 강했을까!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왜 그는 인도 북부 야생의 위험한 숲 속으로 스스로 걸어갔을까!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방안을 돌아보니 무수한 메모를 압도하는 달마가 방안 벽 정중앙에서 가소로운 듯 노려본다.
애월 해안 절벽 위 올레 길은 전망이 좋다. 절벽 아래서 바다 밑을 보면 바닷속 굵은 흰 바위들이 에메랄드 색을 머금은 듯하다. 단애의 절벽은 뜨거운 불 덩어리에 타버린 듯 새까맣다.
오전 내내 하늘이 간 보듯이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긴 원피스 우비를 입고, 배낭 커버를 입힌 후, 우산으로 중무장한다. 이 정도면 폭우가 내려도 걱정 없다. 비가 오는 날 우비 원피스 입고, 작대기 들고, 가파른 산 길을 오르니, 지팡이 집고 시내산을 오르는 영화 장면 모세의 모습이 생각난다.
비가 더 오기 시작한다.
귤 하우스 이층 홈 받이로 빗물이 모여서 아래로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지하 하수구 없는 농지의 시멘트 길이 빗물을 땅속으로 보내지 못하고 비가 금방 시냇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인공 시냇물을 재미 삼아 건너듯 흐르는 빗물을 거슬려 오른다. 맨발에 물살이 세차게 부딪친다.
녹색의 귤 잎과 흰 꽃이 촉촉하게 비에 젖어 싱그럽다.
비가 개는 듯하여 비옷을 벗었더니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비옷을 다시 입고 빗줄기를 맞는다. 비 오는 날 산속은 적막하고 어둡다. 그 많던 새소리도 사라지고, 이파리와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뚜렷하게 들린다.
수산봉 입구에는 뱀 조심 표시가 있다. 어제 뱀을 밟았고, 비 오는 날 어스름한 숲길에서 또 뱀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그렇지만 숲길은 맨발이다. 고즈넉하고, 적막한 숲이라도 숲은 생기가 넘친다. 맨발에 생기가 스며들어, 온몸에 힘이 넘친다.
수산봉은 굵은 소나무와 녹나무가 잘 우거져 있다.
마을 곳곳에 시를 새겨 놓은 비석들이 있다. 읽어 보니 시인 이름도 모두 다르다. 몇몇 시문이 마음에 든다. 수산봉 정상에 있는 시비석도 마음에 들어 카메라에 담았다.
시인이 최문자라 새겨 있다. 인터넷에 확인해 보니 유명한 시인이다
닿고 싶은 곳 ---최문자
나무는 죽고 싶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꾹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수산봉을 내려와 마을에도 시비문이 몇 개 더 있다. 누가 저렇게 집 입구에 시 비문을 세웠는지 궁금하다.
애월이 예술인들의 마을인가? 제주공항 인근이어서 외지인들이 많이 정착할 수 있겠다.
시가 마음에 들어 비가 많이 오는데도 스마트폰을 꺼내서 또 찍었다.
바람 ---- 한분순
한 ㅡ
올
손에 쥐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풀내 꽃 내가 섞여
머리가 말갛다.
그 속에 숨을 포개면
큰 문이 열린다.
나도 수없이 제주의 바람을 움켜쥐고 긴 호흡을 했으니,
큰 문이 열리려나?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외성은 규모면에서 다소 크다.
진도로 피신한 삼별초 군이 총 만 명이었다. 진도의 용장산성에서 여몽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이곳으로 피난 온 잔병 오천 명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쌓은 토성이다.
장비도 없었을 고려말에 2년여 항쟁 기간에 3미터 높이에 약 3킬로 둘레의 토성을 쌓은 것이다.
항파두리 토성 유적지
병사들이 힘들게 쌓은 토성 위에 노란 금계국이 가득 피어 있다. 죽은 원혼의 후손인가?
광령리에 도착하니, 바람이 거세 우산을 접었다.
호텔에 들어왔다. 호텔의 아늑함에 피곤이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