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삼성전자를 바라보면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나는 메모리 산업의 사이클이 다시 상승 국면으로 접어들며 만들어낸 성과의 시간이다. 분기 기준으로 20조 원을 넘보는 영업이익, 다시 고점을 향해 움직이는 주가 흐름은 삼성이라는 기업의 체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파운드리라는 미래 산업의 핵심 영역에서 삼성전자는 여전히 쉽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다. 글로벌 파운드리시장은 이제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를 중심으로 구조가 굳어지고 있고, 애플(Apple), 엔비디아(NVIDIA), 퀄컴(Qualcomm) 등 미국 빅테크들의 첨단 반도체 생산은 대부분 TSMC로 집중되고 있다.
삼성 파운드리의 점유율이 정체 혹은 하락 국면에 있다는 평가가 반복해서 나오는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거론되는 삼성전자와 테슬라(Tesla)의 협력은 단순한 수주 뉴스로 보기 어렵다.
이 협력은 파운드리 시장에서 “누가 더 미세한 공정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던진다.
테슬라가 삼성과 함께 논의하고 있는 칩은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범용 GPU가 아니다.
이 칩은 자율주행 차량과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Optimus)에 탑재되는 온디바이스(On-device) 에지형 AI 칩이다. 언어를 생성하는 반도체가 아니라, 행동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Machine Learning 기반의 ASIC이다.
엔비디아(NVIDIA)의 GPU는 AI 시대를 연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HBM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병렬 연산, 엄청난 전력 소모와 발열을 감내하는 대신, 학습과 언어 모델 추론에서 압도적인 성능을 낸다. 그러나 이 GPU들은 명확한 전제를 갖는다. 데이터센터, 안정적인 전력 공급, 냉각 인프라, 그리고 높은 비용이다.
그래서 구글(Google)조차도 범용 GPU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사 서버 환경에 최적화된 TPU라는 별도의 ASIC을 설계했다.
테슬라는 이 흐름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테슬라가 다루는 문제는 문장을 잘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도로 위에서 브레이크를 언제 밟을 것인지, 사람 옆에서 로봇 팔을 어느 각도로 움직일 것인지, 지금 멈춰야 하는지 아니면 진행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이 세계에서는 질문할 때마다 답이 달라지는 언어형 모델은 오히려 위험하다.
자율주행과 로봇의 세계에서 AI는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판단이 아니라, 항상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결과를 내는 결정적 판단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테슬라의 칩은 언어형 LLM이 아니라, Machine Learning 기반의 행동형 AI ASIC이다. 일부에서 이를 A16이라 부르지만,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이 칩이 ‘창의성’이 아니라 ‘책임’을 전제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행동형 AI 칩은 빠른 연산보다 확정성, 재현성, 안정성을 우선한다.
왜 테슬라는 TSMC가 아니라 삼성전자를 선택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테슬라가 감수한 리스크부터 봐야 한다.
TSMC는 첨단 공정과 수율, 그리고 성능 경쟁에서 가장 앞선 파운드리다. 반면 삼성 파운드리는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 단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테슬라의 선택은 결코 ‘가장 안전한 선택’이 아니다.
그럼에도 테슬라는 삼성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테슬라가 속도의 경쟁보다 통제의 경쟁을 택했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차량과 로봇에 들어가는 칩은 매년 구조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5년, 10년 이상 동일한 아키텍처로 공급되어야 하고, 극단적인 환경에서도 동일한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 최신 공정보다 중요한 것은 장기 공급, 품질 안정성, 그리고 제조 파트너와의 깊은 협력이다.
테슬라에게 삼성전자는 단순한 파운드리가 아니다.
메모리, 시스템 반도체, 패키징, 테스트, 품질 관리까지 포괄하는 종합 제조 역량을 갖춘 파트너다. 테슬라는 삼성과의 협력을 통해 단일 파운드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동시에 장기적인 기술 로드맵을 함께 설계할 수 있는 파트너를 확보한다.
이 선택은 보수적이면서도 전략적이다.
테슬라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니라, 가장 오래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삼성이 TSMC를 그대로 따라잡으려 한다면, 그 싸움은 매우 어렵다. 미세 공정, 수율, 고객 포트폴리오 모두에서 이미 격차가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에게는 또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은 **‘모든 고객을 위한 파운드리’가 아니라, ‘특정 산업에 깊이 들어가는 파운드리’**가 되는 길이다.
AI 산업은 이제 하나의 방향으로만 가지 않는다.
데이터센터의 AI, 언어의 AI, 그리고 행동하는 AI로 분화되고 있다.
이 중 행동하는 AI는 로봇, 자율주행, 산업 자동화와 직접 연결된다. 이 영역에서는 최신 공정보다 안정성, 신뢰성, 공동 설계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삼성 파운드리가 제2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공정 경쟁에서의 집착을 내려놓는 용기다.
모든 고객을 대상으로 최첨단 공정을 제공하려 하기보다, 특정 산업에 맞는 ‘충분히 좋은 공정’을 장기적으로 제공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둘째, 고객과의 관계를 계약이 아니라 공동 개발로 재정의해야 한다.
행동형 AI 칩은 설계와 제조가 분리되지 않는다. 파운드리는 단순한 생산자가 아니라, 시스템 설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셋째, 품질과 신뢰를 수치가 아닌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자율주행과 로봇용 반도체에서 한 번의 실패는 치명적이다. 이 영역에서는 마케팅보다 ‘사고 이력 없는 10년’이 더 강력한 경쟁력이다.
넷째, 국내 팹리스 생태계와의 연계다.
딥엑스(DEEPX), 모빌린트(Mobilint), BOS 세미컨덕터스(BOS Semiconductors)와 같은 에지 AI 팹리스들은 GPU와 경쟁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현장에 특화된 반도체를 만든다. 삼성 파운드리가 이들과 함께 성장한다면, 단순한 점유율 이상의 의미를 만들 수 있다.
AI는 이제 데이터센터를 벗어나고 있다.
공장으로, 물류 현장으로, 도로 위로, 그리고 로봇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요구되는 반도체는 더 빠른 연산이 아니라, 오래 버티는 기술이다.
삼성전자와 테슬라의 협력은 이 변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누가 더 강한가의 경쟁이 아니라, AI 산업이 하나의 축에서 여러 축으로 분화되고 있다는 신호다.
데이터센터의 AI, 언어의 AI, 그리고 행동하는 AI.
삼성과 테슬라는 그 세 번째 영역에서 각자의 역할을 선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