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한몸된 삼성전자 반도체 슈퍼 사이클

메모리는 다시 산업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by 한재영 신피질

나는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에서 약 20여 년을 근무한 뒤, LCD 사업으로 옮겨 퇴임했다. 그 시간 동안 메모리는 몇 차례 큰 파도를 경험했다. 윈도우 도입 초기 PC 보급이 급격히 늘어나며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던 시기, 밀레니엄을 앞두고 Y2K 문제로 기업과 공공기관이 서버와 시스템을 한꺼번에 교체하던 시기였다. 그때마다 메모리는 산업의 중심에 있었고 수요는 분명히 컸다.


하지만 최근 AI로 촉발된 메모리 수요 증가는 내가 현업에 있던 그 어느 시기보다 더 크고, 더 광범위하며, 무엇보다 훨씬 더 지속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느낀다. 이번 변화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산업 구조 자체를 바꾸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AI는 소프트웨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몸체는 철저히 하드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하드웨어의 가장 깊은 곳에는 다시 한번 메모리가 있다. 오랫동안 메모리는 경기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는 산업처럼 보였다. 좋을 때는 대박이고 나쁠 때는 폭망하는, 그래서 늘 ‘사이클’이라는 단어로 설명되던 영역이었다. 그러나 AI가 산업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메모리는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다. 다시 한번 산업의 심장으로 돌아왔다.


AI 이전의 데이터센터는 비교적 단순한 공간이었다. CPU 중심의 연산, 제한적인 메모리 용량, 스토리지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다. 그러나 AI 데이터센터는 전혀 다른 구조를 요구한다. 대규모 언어 모델과 에이전트 AI는 연산 자체보다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자주 이동시키느냐에 훨씬 더 민감하다. 이 변화의 중심에 메모리가 있다.


그 결과 기존 데이터센터와 AI 전용 데이터센터 모두에서 서버 메인메모리의 기본 사양은 빠르게 상향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32GB가 표준이던 서버 메모리는 이제 64GB로 전환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이 변화는 단순한 사양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메모리 산업 전체의 수익 구조를 바꾸는 신호다.


2025년을 지나며 서버용 64GB DRAM 모듈 가격은 연초 약 250달러 수준에서 연말 기준 400달러 후반대까지 상승한 것으로 시장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고정비 비중이 극도로 높은 메모리 산업의 특성상 이 가격 변화는 곧바로 이익의 급증으로 이어진다.


이 흐름은 숫자로도 분명히 드러난다. 2024년 4분기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의 영업이익은 약 5~6조 원 수준으로 시장은 평가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2025년 4분기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은 약 16조 원 내외로 확대된 것으로 컨센서스가 형성돼 있다. 거의 3배에 가까운 이익 증가다. 이는 단순한 경기 회복의 결과가 아니라 AI가 메모리를 다시 필수 인프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주가 역시 이 변화를 따라 움직였다. 한때 ‘5만 전자’라는 자조 섞인 별명이 붙었던 주가는 2025년을 지나며 13만 원 선을 넘어서는 구간까지 회복됐다. 시장은 뒤늦게 그러나 분명하게 방향을 수정하고 있다.


AI 메모리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는 HBM이다. 이 영역에서 삼성전자가 경쟁사에 뒤처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사이클을 HBM 하나로만 설명하는 것은 현실을 놓치는 일이다. AI 서버의 절대다수는 여전히 범용 서버 DRAM을 대량으로 필요로 한다.


이 영역에서 삼성전자는 다시 한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압도적인 생산 규모, 높은 수율, 안정적인 공급 능력. HBM에서의 열세를 메인메모리에서의 확실한 이익으로 상쇄한 구조다. 이번 슈퍼 사이클이 삼성에게 단순한 반등이 아니라 의미 있는 전환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I 데이터센터가 커질수록 DRAM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연산 결과와 학습 데이터, 로그와 체크포인트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NAND 기반 SSD다. AI 데이터센터에서 SSD는 더 이상 보조 저장장치가 아니라 성능과 비용의 균형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DRAM과 NAND 모두에서 세계 1위 생산능력을 보유한 삼성전자는 이 조용하지만 강력한 흐름에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고 있다.


이번 사이클을 과거와 완전히 다르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공급 구조다. 첨단 메모리 FAB 한 개 라인을 구축하는 데 드는 비용은 현재 기준 약 15조 원에서 25조 원 수준으로 평가된다. 최근 노광장비의 절대 강자인 ASML의 EUV 장비는 한 대 가격이 3,500억 원을 넘는다. 최신 보잉 항공기 한 대 가격보다 비싸다.


FAB 한 개 라인에는 이런 장비가 여러 대 들어간다. 여기에 공장 건설, 클린룸, 전력과 용수 인프라, 공정 장비, 그리고 무엇보다 수율 안정까지 고려하면 공장 착공에서 양산까지 최소 3~4년이 필요하다. 이 정도의 자본과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은 사실상 극히 제한적이다.


이 변화는 데이터센터에만 머물지 않는다. AI는 점차 단말기로 내려오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온디바이스 AI가 확산되면서 NPU를 포함한 AP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이를 뒷받침하는 모바일 DRAM 용량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8GB가 충분하던 스마트폰 메모리는 16GB, 24GB까지 확대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 흐름은 PC와 TV 같은 전통적인 컨슈머 제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AI 기능이 기본 탑재되기 시작하면서 로컬 연산과 실시간 처리, 사용자 맥락을 유지하기 위한 메모리 요구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자동차는 더 극적이다. 자율주행, ADAS, 인포테인먼트, 차량 내 AI 비서까지 자동차는 바퀴 달린 컴퓨터가 되었고 그 안에는 서버 못지않은 메모리 수요가 생겨나고 있다.


HBM, 서버 DRAM, SSD, 모바일 DRAM. 수요는 전방위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공급은 천문학적 투자와 긴 리드타임 때문에 쉽게 늘릴 수 없다. 이번 메모리 슈퍼 사이클은 짧고 뜨거운 반등이 아니라 길고 무거운 구조적 변화에 가깝다.


여기에 추가로 주목해야 할 요소는 에너지와 지정학이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고, 이는 데이터센터 입지와 국가 전략으로 이어진다. 메모리는 단순한 부품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일부가 되고 있다. 또한 반도체 인력, 공정 노하우, 장비 생태계는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는 자산이 되었다.


지금 삼성전자는 분명히 최고의 기회 구간에 서 있다. 메모리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현금은 단순한 방어용 자산이 아니다. 이 돈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전략 자본이다.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연결하는 장기 전략, 기술과 인재에 대한 지속 투자, 그리고 단기 실적을 넘어선 산업적 시야가 필요하다.


이번 메모리 슈퍼 사이클은 삼성에게 축복이자 시험이다. 수요는 명확하고 구조는 유리하며 경쟁자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일수록 기업은 안주하기 쉽다. 지금 삼성에게 필요한 것은 ‘잘하고 있다’는 만족이 아니라 이 기회를 어떻게 미래로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이다.


메모리는 다시 한국 산업의 심장으로 돌아왔다. 이 심장이 어디까지 뛸 수 있을지는 지금부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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