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과 기업은 어떻게 달랐는가?

2부 기업은 처음에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by 한재영 신피질

우리는 기업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도시에 들어서면 건물마다 기업 간판이 붙어 있고, 대부분 사람들은 기업에 소속되어 일하며, 국가 경제 정책 역시 기업의 투자와 고용을 중심으로 설계된다. 그래서 기업은 마치 인류 역사와 함께 존재해 온 제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기업은 생각보다 늦게 등장했다. 인류 문명의 긴 시간 속에서 오래된 것은 ‘기업’이 아니라 ‘상인’이었다. 기업의 뿌리를 묻는다면, 먼저 상인을 떠올려야 한다.


상인 역사는 문명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농경이 시작되고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사람들은 교환을 시작했다. 먼 지역의 물건을 가져와 바꾸고, 차이가 나는 가치만큼 이익을 남기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같은 고대 문명의 기록에서도 상인의 흔적이 보이고, 지중해를 누볐던 페니키아 상인, 중앙아시아를 횡단했던 대상(隊商),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오갔던 해상 무역상까지, 상인은 오래전부터 인간 사회의 이동과 교환을 책임져 왔다.

상인들.png 개인들이 주도한 상인들


상인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세계였다. 상인은 자신의 자본으로 물건을 사고, 그것을 다른 지역으로 운반해 더 비싼 가격에 팔아 차익을 얻는다. 위험은 컸지만 구조는 단순했다. 오늘날로 치면 개인 사업자에 가깝다. 상인이 죽으면 사업도 거의 함께 사라졌고, 성공과 실패는 개인의 판단과 운, 그리고 체력과 용기에 크게 의존했다. 상인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결국 이것이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


그렇다면 기업은 무엇이 다른가. 기업은 단지 규모가 큰 상인일까. 아니다. 기업은 ‘규모 확대’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다. 상인이 개인이라면 기업은 조직이다. 상인 활동이 개인의 생애에 묶여 있다면, 기업은 개인이 떠나도 지속되는 장치다. 이 차이는 단순해 보이지만, 경제의 형태를 바꾸는 결정적 차이였다.


기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대항해 시대 이후, 특히 17세기 유럽에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Dutch East India Company, VOC) **와 1600년에 설립된 **영국 동인도회사 (British East India Company) **다.

이 두 회사는 흔히 근대 기업의 출발점으로 언급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png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OC)- 조직이 만든 시스템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 기업들은 흔히 ‘민간 기업’으로 불리지만, 실은 현대인이 떠올리는 순수한 의미의 민간 기업과는 거리가 있다. 이들은 **국가가 허가하고 권한을 부여한 특허 기업 (chartered company) **에 가까웠다.


당시의 장거리 무역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사업이었다. 아시아로 향하는 항해는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걸렸고, 선박과 선원, 무역 상품을 준비하는 데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한 번 실패하면 전 재산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해적과 전염병, 폭풍은 ‘변수’가 아니라 항해의 상수였다. 개인 상인에게 장거리 무역은 과감한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무모한 도박에 가까웠다.


그래서 등장한 발상이 ‘자본을 모으는 조직’이다. 여러 사람이 돈을 내고, 그 돈을 하나로 모아 배를 보내며, 성공하면 이익을 나누는 방식. 여기에서 주식이라는 개념이 태어난다. 상인의 세계가 개인의 용기와 경험에 의존했다면, 기업의 세계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제도를 발명한 셈이다. 이때부터 경제의 주인공은 개인 상인에서 조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OC는 그 성격이 특히 극적이다. VOC는 여러 도시 상인들과 금융가들이 결합해 만든 ‘상인 연합체’였지만, 동시에 단순한 상인 집단을 넘어선 새로운 존재였다. 왜냐하면 이 회사는 국가 권력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일반적인 ‘국왕 중심 국가’와 다소 달랐다. VOC가 설립된 1602년의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공화국 (Dutch Republic) **이었고, 스페인과의 오랜 독립 전쟁 속에서 ‘상인 공화국’에 가까운 정치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말은 곧, 국가의 이해관계가 상인의 이해관계와 깊게 얽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가는 VOC에게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군대를 보유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조약을 체결할 권한까지 허용했다. 말하자면 국가가 기업에게 국가의 역할 일부를 위임한 셈이다.

무역이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향신료 무역의 현장은 이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요새와 무력을 기반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배만 보낸다고 무역이 되지 않았다. 무역을 하려면 그 무역을 지킬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VOC는 ‘무역 회사’인 동시에 ‘군사 조직’이었다. 기업이면서 동시에 작은 국가처럼 행동할 수 있는 존재, 이 독특한 형태를 두고 사람들은 VOC를 **기업 국가 (company-state)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상인과 기업의 차이가 더욱 선명해진다. 상인은 경제 활동의 주체이지만, 기업은 때때로 정치와 군사까지 엮이는 조직이 된다. 상인이 시장에서 거래한다면, 기업은 때로 시장 자체를 만들고 지배한다. 상인이 항로를 따라 움직였다면, 기업은 항로의 규칙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상인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는데, 왜 기업은 17세기에야 등장했을까. 이 질문은 기업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기업이 탄생하려면 단순히 상업 활동만으로는 부족했다.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는 ‘규모’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투자와 위험이 등장해야 했다. 둘째는 ‘법’이다.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독립된 존재, 즉 **법인 (corporation) **이라는 개념이 필요했다. 셋째는 ‘금융’이다. 많은 사람이 자본을 투자하고 지분을 나누며, 그 지분을 사고팔 수 있는 금융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 세 조건이 함께 성숙한 시점이 17세기였고, 그 조건들이 맞아떨어지며 기업은 비로소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기업은 결국 무엇을 위해 탄생했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였을까. 물론 이익은 중요했다. 그러나 출발점은 조금 다르다. 기업은 처음부터 ‘이익만을 위한 장치’라기보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다. 대규모 자본과 대규모 협력, 위험의 분산과 지속성. 기업은 이런 조건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 개인의 용기와 경험이 닿지 않는 곳에 조직이라는 장치를 세운 것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기업의 성격은 다시 변한다. 이제 기업은 국가의 특허를 받아 해외 무역을 독점하는 형태뿐 아니라, 기술과 혁신을 기반으로 스스로 시장을 만들어 가는 조직으로 확장된다. 이때부터 기업의 중심에는 상인뿐 아니라 **기업가 (entrepreneur) **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기술과 공장, 생산 혁신이 기업의 핵심이 되면서 기업은 ‘국가 프로젝트의 수행자’에서 ‘혁신을 통해 시장을 창조하는 주체’로 변해 간다. 기업은 끊임없이 변형되어 왔다. 고정된 형태로 존재해 온 적이 없다.

산업혁명.png


여기까지 오면 자연스럽게 현재로 시선이 돌아온다. 기업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라는 새로운 조건이 등장한 지금, 기업은 또 어떤 형태로 변할 것인가. 오늘날 기업은 다시 거대한 전환점을 마주하고 있다. 생산과 노동의 의미가 바뀌고, 기술이 조직 내부의 의사결정까지 침투하는 시대다. 우리는 종종 기업을 하나의 자연물처럼 대하지만, 사실 기업은 ‘사회가 만든 장치’다. 그리고 장치는 시대가 바뀌면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 다시 기업을 묻는 이유는 단순히 기업이 커졌기 때문이 아니라, 기업이 태어날 때부터 품고 있던 질문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업은 원래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제 인공지능이 개인의 능력 자체를 확장하고, 동시에 대규모 조직의 경계도 다시 흔드는 시대가 왔다. 그 순간 우리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기업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기업은 처음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라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때 비로소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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