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없는이야기

떡볶이

by 방구석오랑우탄

아침의 베이지색은 여지없이 나를 찾아와 짓누른다.
벽지 구석에 피어난 작은 얼룩을 보며
내 인생도 저 얼룩처럼 서서히 번져가다 잊혀질 거라 확신한다.
씻지 않은 머리칼이 무겁고,
핸드폰 너머 세상은 나만 빼고 모두가 선명한 고해상도인 것 같아
나는 자꾸만 이불 속으로 침잠한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다가도
막상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찬 공기에 어깨를 움츠린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엔 나는 너무 추위를 잘 타고,
죽음을 결심하기엔 내일 올 택배가 아주 조금 궁금하다.
이런 내가 한심해서 천장을 보고 있으면
뱃속에서 꼬르륵, 하고 생존의 신호가 들려온다.
세상에서 가장 눈치 없는 소리.
​결국 나는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온다.
도시는 여전히 회색의 팔레트지만,
골목 모퉁이 분식집 앞에서 멈춰 선다.


뿌연 김 사이로 비치는 저 채도 높은 빨간색.
건강한 사람들은 독이라고 부를지 모를 그 자극적인 색깔이
지금 나의 무채색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색이다.
​"1인분 주세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와 한 번 더 뱉는다.
죽고 싶다는 말보다 떡볶이 1인분을 주문하는 말이 더 어렵다.
주인 아주머니가 건네는 멜라민 그릇 위에는
삶의 비참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첫 입은 맵고, 두 번째 입은 달고, 세 번째 입은 쓰다.
삶이 원래 이런 맛이었나.
아니, 삶은 맛이 없는데 이 떡볶이만 맛이 있는 거다.
어금니에 닿는 떡의 저항감을 느끼며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 우울을 씹어 삼키는 중인가,
아니면 이 붉은 양념에 나를 잠시 담가두는 중인가.
​국물을 마실 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통증.
그 통증이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죽음의 설계도들이
매운맛의 습격 앞에 잠시 종이 조각처럼 흩어진다.
고작 설탕과 고춧가루 버무린 것에 무너질 절망이라면
나의 죽음은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나.
​그릇을 비우고 나면 입가에 붉은 흔적이 남는다.
이것은 내가 오늘 사투를 벌였다는 훈장인가, 아니면 그저 지저분한 식사의 흔적인가.
가게를 나서며 다시 마주한 차가운 공기는 아까보다 덜 날카롭다.
여전히 내일이 기대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배가 불러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내 방 구석에 웅크리고 있겠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 생각이 나를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나는 편의점으로, 혹은 낡은 분식집으로 도망칠 것이다.
거창한 철학이나 위로의 말 대신
딱 3,500원짜리 매운맛에 기대를 걸면서.
​내일은 연한 초록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시 탁한 베이지색일 확률이 높다.
그래도 상관없다.
세상에는 아직 내가 먹어보지 못한 떡볶이 집이 많고,


그 맛들을 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 제목 없는 이야기를 끝낼 수 없으니까.
​비겁하고 구차한 희망이라도 좋다.
라면 값보다 싸고, 떡볶이보다 자극적인 그 마음이면 충분하다.
나는 다시 튀지 않는 색으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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