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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 집착은 완벽주의다.

'전문가가 아니니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유로운 모든 관점이 선생님이 되기엔 어렵다. 하지만 개인이 지닌 관점은 흥미로운 발표 주제가 된다. 때로는 선생님의 수업보다 재미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개인의 [관점]을 선생님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에게 나무를 그려보라 한다면 다 다른 형태의 나무가 등장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는 나무를 그리는 방법이 아니라.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그렸지?'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아이들이 자신이 그린 나무에 대해 설명한다면 선생님이 알려주는 나무를 그리는 방법보다 더욱 흥미롭게 느낀다.



이처럼 정교한 지식이 아니라, 생각에 풍미를 얹어주는 타인의 관점은 흥미롭고 가치 있다.



그러니 크게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영화, 드라마, 브랜드, 식당 그리고 친구와 연인, 부모 등이 말하는 일상적의 관점은 이런 풍미를 얹어주는 흥미로운 가치를 유발한다.



결국 개인의 관점에서 탄생된 창작물을 경험한다. 그래서 좋은 창작자가 된다면 좋은 창작물을 만들어낼 확률이 높다. 좋은 사람과 사랑을 나눠 평생의 동반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처럼 말이다.



자연으로부터 배우면 쉽다. 자연은 정교하지 않다. 늘 감탄과 영감을 건넨다. 감히 인간의 생각으로 자연을 뻔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질서가 없는 자연으로부터 질서가 필요한 인간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자문한다면 질서가 필요한 인간으로 거듭난 이유를 살펴보면 쉽다. 질서 없는 인간이 모인 사회는 평화로운 자연을 연상하진 않기 때문이다.



질서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존재에 불과하지만, 잊어서 안 되는 점은 오직 개인이 지닌 가치다. 울타리 안에 있는 새라고 다 똑같은 색을 띠진 않는다. 유행은 개인의 가치를 찾기 싫은 목소리에 불과하다.



거울이 없으니 자신의 색을 보기 어렵지만 자신의 가치를 믿을 이유는 충분하다. 아이들의 그린 나무가 다 다르듯, 자신이 그린 나무도 다르다. 만일 비슷하다 하더라도 둘이 그린 나무가 뜻하는 의미는 다를 확률이 높다.



그러니 각자가 지닌 자신의 관점을 사랑하자. 숫자도 1부터 시작하듯, 그게 첫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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