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 이란 책에서 Diana Ross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빼놓을 수 없는 그녀의 곡 “Endless Love”에 대한 내용을 읽다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고 3 때 기숙사 생활을 했다. 수험생으로 살아야 하는 것도 숨 막혔는데 닭장 같은 기숙사의 삶은 자유로운 영혼인 나에겐 고통 그 자체였다. 대부분 고3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던 기숙사는 군대 내무반처럼 복도식으로 된 구조였다. 8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을 두 군데로 나눠 생활하도록 했으니 불편한 게 이만저만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어느 날, 영화 보러 무단외출을 하자고 친구를 꼬드겼다. 모범생 내 친구는 계속 망설였지만 결국 나의 집요함에 넘어가고 말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군산 아카데미 극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본 영화는 91년에 재개봉한 브룩 쉴즈 주연의 “Endless Love”였다.
영화 보는 내내 나와 친구는 브룩 쉴즈의 미모에 홀딱 빠졌다. 책받침 스타로 국내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본 건 둘 다 처음이었다. “이래서 브룩 쉴즈 브룩 쉴즈 하는구나” 나와 친구는 영화가 끝난 후 택시 안에서 연신 브룩 쉴즈 찬양을 하고 있었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뭘 얼마나 좋은 걸 보고 왔길래 그러냐?”며 물었다.
그날 저녁, 눈을 감으면 브룩 쉴즈가 눈에 아른거렸다. 그다음 날, 그 다음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서양 미녀를 짝사랑하게 되다니. 황당하지만 어쩌겠나 그녀 때문에 심장이 나대는 걸.
결국 며칠 후 음반 가게로 달려가 영화 OST를 구입했다. 마틴 휴이트와 브룩 쉴즈의 입술은 절묘한 각도로 열린 채 살짝 닿아 있다. 표정은 또 얼마나 황홀한지. 당시에도 이 정도 아찔한 포스터가 어떻게 심의에 통과할 수 있었나 싶은 생각을 했을 정도다. 왼쪽 편 남자 주인공의 점유율이 조금 더 많아 보이지만 오로지 내 눈엔 브룩 쉴즈뿐.
영화 주제곡인 Diana Ross와 Lionel Richie가 부른 “Endless Love”란 곡은 유명한 곡이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래 위에 스토리와 영상미가 더해지니 음악이 귀뿐 아닌 눈과 가슴에 쏟아졌다. OST 음반에는 총 11곡이 수록됐는데 그중 연주곡이 6곡, 가수들이 부르는 곡은 5곡. 주제곡이 두 번 반복되니 실제 가수들이 부르는 곡은 4곡인 셈이다. 솔직히 전체적인 곡과 구성은 내 취향은 아니다. 황당하지만 어쩌겠나 그녀 때문에 용서되는 걸.
이 음반에서 내 취향저격 곡은 B면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제곡이다. 주인공 데이비드(마틴 휴이트)의 독백, 제이드(브룩 쉴즈)와 그녀의 엄마인 안나(셜리 나이트)의 대화 이후 바로 이어지는 “Endless Love”는 상상하며 듣는 기쁨, 영화 장면 안에 있는 것 같은 몰입을 선물했다.
“여보. 내가 이 음악을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아?” 들뜬 마음으로 아내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화 보고 난 후 나도 저런 영원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 사랑을 이렇게 만났네. 당신이 내 브룩 쉴즈였어.” 백신 맞고 골골대던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