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독서모임이 있는 날. 3년 전 간사 출신 목회자로 구성된 우리 모임은 매년 조금씩 수가 늘어나 10여 명이 함께하고 있다. 돌아가면서 읽을 책을 선정하는데 이번에는 내 차례다. 나는 오래전에 사놓고 읽지 못한 <스토너>를 추천했다. 이전에 읽은 <별 것 아닌 선의>에서 이 책을 인용한 걸 보고 끌렸는데 아내도 여러 경로로 이 책 이야기를 들었다며 <스토너>를 인생 책으로 꼽는 작가가 많다고 했다. 아내가 속한 책모임에서도 읽고 좋았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책의 절반 가까이 읽을 때까지 이야기 흐름이나 내용이 예상과 다르게 밋밋하고, 긴장감이 낮아 당황했다. 심지어 책을 다 읽고 날 때까지도 이렇다 할 극적 반전이 없어 완만한 평지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토너>는 1965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러나 약 50년 뒤부터 유럽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재조명을 받기 시작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대단한 역주행이 아닐 수 없다. 왜 이 책이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시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포함된 내용이니 주의하시라.
주인공 스토너는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를 짓다 군청 직원의 추천으로 농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교양 과목으로 듣게 된 영문학 수업을 통해 문학에 흥미를 느끼고 전공을 바꾸게 된다. 담당 교수였던 슬론은 그의 재능을 알아봤고, 그가 진로를 결정하도록 돕는다. 졸업한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강사가 되었고,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섰다. 하지만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거나 교육자로 학생들의 인정을 받거나,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 것도 아니다. 아내와 평생 불화했고, 딸과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심지어 혼외 관계로 만나게 된 뜨거운 사랑도 실패로 끝이 난다. 그야말로 대단하지 않은 별 것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대단하지 않음’과 ‘별 것 없는 삶’이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킨 게 아닐까.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햄릿만큼 고민할 수 없고(하지 않고) 돈키호테처럼 착각할 수 없다.(하지 않는다.) 스토너는 햄릿처럼 비극적이지 않고 돈키호테처럼 희극적이지 않다. 복수를 위해 싸우다 파멸하지도 않고 파멸한 자아로 살아감으로써 세상에 복수하지도 않는다. 『스토너』의 발견이 한 권의 책을 발견한 일만은 아닌 이유는 ‘스토너’라는 한 위대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발견이자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어느 전형에 대한 발견이기도 한 탓이다. 햄릿과 돈키호테가 근대의 인간을 이해하는 스토리였다면 스토너는 21세기 현대인들이 삶과 인간을 이해하는 스토리다.”
왜 이 책이 밋밋하고 긴장감이 없는지 이해됐다. 대단한 업적과 성과, 출세와 성공, 유명세를 가진 소수와 달리 대다수는 작은 세계에서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해내며 산다. 기억될 만한 위대한 성취보다 눈앞에 닥친 과업을 해내기에 급급하며.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삶이 대부분이 겪는 공통의 인생 경험이며, 보편적 평범함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스토너의 이야기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아내 이디스, 딸 그레이스, 짧은 사랑을 나눈 캐서린.
사립 여학교에서 남편과 가족을 위해 수행해야 할 의무를 배운 이디스는 이모와 유럽 여행을 앞두고 만나게 된 스토너로 인해 그토록 꿈꾸던 여행을 포기한다. 서둘러 결혼했지만 한 달 만에 둘의 결혼은 삐걱거린다. 아픈 몸,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그녀는 새로운 변화를 갈망한다. 극단 활동에 참여해 보고, 친정에 머물며 외모를 가꾸며, 그림과 도예 등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는 우울과 슬픔이 늘 짙게 드리웠다.
그레이스는 엄마의 강요와 제재 속에 점점 웃음기를 잃는다. 한때 아빠 스토너와 단란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양육의 주도권이 엄마 이디스에게 넘어간 뒤로 무력한 아버지에 대해 체념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었던 그레이스는 부모와 분리를 선택한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임신 그리고 결혼. 결혼 직후 전쟁에 나간 남편의 전사. 이제 그녀는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
스토너의 수업에서 처음 만난 캐서린. 논문을 매개로 스토너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 그녀는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주위에 알려지며 학교의 압력을 받은 그녀. 결국 사임은 그녀의 몫이 되었고 날이 밝기 전 조용히 떠난다.
스토너가 성공과 업적을 내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문학을 연구했고, 끝까지 강단에 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디스와 그레이스, 캐서린.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대단한 것을 얻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았던 스토너. 그러나 그 평범함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던 세 여인의 이야기가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삶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남길까. 우리가 인생에서 얻게 되는 것,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을 앞둔 스토너의 독백이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이명처럼 귓가에 맴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