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기도

by 쓰다쟁이

글쓰기에 관심이 없던 내가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2년 전쯤이다. 당시 나는 외로움과 상실감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숭례문학당에서 나온 『이젠 함께 읽기다』를 시작으로 『이젠 함께 걷기다』,『이젠 함께 쓰기다』 시리즈를 읽었다. 같이 읽는 건 익숙했지만 같이 걷고 같이 쓴다는 이야기는 생소하게 들렸다. 걷고 쓰는 것을 통해 정서가 살아나고 몸과 마음이 회복되었다는 증언들이 마음에 와닿았고,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설득당했다. 마침 사춘기를 한참 통과하던 딸로 인해 힘들어하던 아내와 걷기를 먼저 시작했다. 둘 다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걸 경험했고, 검증된 효과를 바탕으로 성도들을 초대해 함께 100일 걷기 모임인 ‘오키나와’(‘5km 걷게 나와’의 줄임말)를 시작했다. 그런데 글쓰기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전까지 글쓰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데다 100일 동안 매일 글 쓸 자신이 없었다. 잘 써야 할 것 같은 부담도 한몫했다. 일단 저질러보자는 심정으로 교회에 광고해 글벗을 모집했다.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참여했다. 함께 쓰면서 누리는 유익들을 글로 정리해 지난해 sns에 소개했었다. 올해도 글놀이야 시즌 2를 시작했다. 작년보다 참여자들이 조금 더 늘었다.

글쓰기를 통해 쓰기가 기도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1. 마음이 가난한 자의 글쓰기, 애통해하는 자의 기도

절박함이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하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랬다. 무력과 우울을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모르던 때 글쓰기를 만났다. 힘들지 않았더라면 글을 쓰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던 계기도 고통 때문이었다. 첫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원룸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가정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입맛을 잃어 숟가락을 들지 못하던 날이 잦았다. 아내가 잠든 깊은 밤에 침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방구석에 무릎을 꿇었다. 아픔을 삼키며 묵음으로 드리는 신음의 기도였다. 분명 기도와 글쓰기는 괴로운 이들의 탈출구다.

2. 기도의 노동, 노동의 글쓰기

매일 글 쓰는 일이 만만치 않다. 잘 써지는 날은 20분 안에도 뚝딱 써 내려가지만 안 써지는 날은 곤혹을 치른다. 일정이 빡빡한 날이나 밤늦게 귀가한 날, 밀린 숙제 하듯 졸린 눈을 비비며 간신히 글을 써야 할 때도 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글 써서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란 말이 절로 나온다. 글쓰기가 노동이란 걸 깨달았고, 몸이 아픈 작가들이 왜 많은 지 써보니 알 것 같았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은 매일 두 시간씩 거르지 않고 기도했다. 매일 쉬지 않고 하는 건 뭐든 어렵다. 처음 기도에 매진할 때 몸과 마음의 변화가 일었다. 설교가 달라지고 여러 영적 체험도 있었다. 변화와 체험은 부스터가 되어 기도의 추진력을 높였다. 그러나 곧 기도의 권태기가 찾아왔다. 누군가 영혼에 냉수를 부은 것처럼 기도는 차갑게 식었다. 크게 부르짖어 봤지만 갈수록 공허를 느꼈고, 메마름 속에 영혼이 말라 가는 것 같았다.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기도를 쉬지 않는 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기도해야 했다.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스승은 좋은 기도는 매일 하는 기도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매일 쓰라고 권한다. 잘 써지는 날도, 안 써지는 날도, 피곤한 날도, 바쁜 날도. 기도와 글쓰기는 반복과 지루함, 은밀함의 활동이다. 모든 근육은 ‘꾸준하게’, ‘무료하게’, ‘홀로’라는 부사를 통해서만 길러진다.

3. 나약한 말, 연약한 글

어떻게 글을 써야 좋을지 몰라 글쓰기와 관련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글쓰기를 가르쳐 준 책들은 대부분 정직하게 쓰기를 권했다. 내가 읽었던 에세이들 중 좋았던 책은 작가가 자기의 언어로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준 글들로 꽉 차 있었다. 빼어난 언어구사력, 적절한 표현과 정확한 맞춤법, 찰떡같은 비유 등의 기술보다 투명하게 자기를 열어 보이는 능력이 글쓰기에 더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글은 신비하다. 나약함을 내보일수록 글의 힘은 더 세졌다. 깊은 사색과 성찰을 거쳐 발효된 글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무래도 글쓰기는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 연약함을 노출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만들어주는 게 분명하다.

기도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가장 많이 듣는 대답이 ‘하나님과 대화’이다. 그럼 나는 다시 묻는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냐고.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속내를 감추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죄와 수치, 허물과 나약함을 이야기할 수 없는 건 둘 중 하나다. 상대가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거나,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편하게 나를 꺼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나는 기도가 강한 사람이 아닌 약한 사람을 길러낸다고 믿는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 지 발견하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을 높여준다. 나의 작음을 알고 그의 크심을 아는 사람이 된다. 기도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시간이다.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힘과 위협, 강요나 압박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는 편안함과 안전함을 제공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있기를 즐겨한다. 글을 쓰고 기도하는 이들은 정직하고 솔직하다. 연약함은 그들의 힘이다.

4.eyes wide open

“이러다 곧 책 쓰시는 거 아녜요?” 글쓰기를 하면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다. 솔직히 처음엔 그런 욕심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글쓰기의 목적은 책을 출간하는 데 있지 않다는 걸. 이슬아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는 삶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고 나를 더 깊이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글 쓰는 일이 밝기보다 색상과 관련된 작업이라 믿는다. 남보다 빛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의 고유한 빛깔을 알아가기 위해 쓴다. 작문은 마음속 감춰둔 생각들을 캐내고, 다치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고, 웅크리던 나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간이다. 글감 사냥을 하려면 눈을 부릅뜨고 먹잇감을 살펴야 한다. 먹잇감은 바로 나다.

신대원 영성 수업 때 교수님은 관상기도는 없고, 관성적 삶만 있다고 말씀하셨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앉아서 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살피고 알아채는 활동이다. 기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힘이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채고, 그 하나님을 듣기 때문이다. 우연처럼 일어난 사건, 뜻하지 않은 만남, 밋밋한 일상 속에 깃든 은총과 섭리를 발견하게 만드는 힘이 기도를 통해 주어진다.

글쓰기와 기도는 나에 대한 발견, 삶에 대한 해석을 돕는다.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일상에 깃든 신비를 관찰한다. 사랑은 바라봄에서 시작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글쓰기를 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중에 마음 따뜻한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알 것 같다.

글쓰기는 기도다. 오늘 밤, 내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은 글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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