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무슨 날이게. 바로 너와 내가 사귀기 시작한 날이지. 2001년 11월 29일. 20년 전 저녁을 먹다가 내가 먼저 사귀자고 말을 꺼냈을 때 얼굴이 빨개진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대답했지. 대학 때부터 넌 눈에 띄는 후배였어. 모든 모임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시간 약속도 철저히 지키던 모범생이었지. 수련회 아침 구보 때도 늘 일찍 나와 맨 앞줄에서 예비역들과 달리던 모습은 잊을 수 없어. 그래서 여자 예비역으로 불렸던 것 너도 기억나지? 너의 성실함이 좋았어. 믿음직하고 변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똥 손이던 나는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늘 부러워했어. 큰 행사를 앞둔 어느 날 모임이 있어 사무실에 갔을 때 데코레이션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그리고 자르고 풀칠하고 있더라. 네 옆을 지나면서 힐끔힐끔 널 쳐다봤어. 세상에나. 어쩜 그렇게 예쁘게 만들던지. 거기 있던 사람들 가운데 너의 솜씨는 단연 으뜸이었어. 이상하더라. 안쪽 방에서 모임을 하면서도 자꾸 네게 시선이 쏠리더라.
대화를 나눌 때면 너는 온몸으로 내 이야기를 들으며 반응해 줬어. 적절한 고갯짓, 공감하는 표정, 과하지 않은 추임새에 가뜩이나 말하기 좋아하는 나는 신이 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었지. 너랑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존중받고 있다고 느꼈어.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도 널 귀명창이라고 부르나 봐.
함께 간사 시험을 보고, 신입 훈련을 받으면서 우린 더 나눌 이야기가 많아졌지. 강의에 대한 소감, 훈련 중 느낀 어려움을 언제든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라 좋았어. 훈련을 마치고 캠퍼스로 돌아왔을 때 간사로 사역하는 널 보며 입이 떡 벌어졌어. 학생들을 대하는 인격적인 태도, 긍휼의 마음, 강의와 설교, 기도회와 찬양 인도, 상담 등 어느 것 하나 모자란 것이 없어 보였거든. 그런 네가 멋졌고 부럽기까지 했단다. 널 향한 내 존경심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천천히 가까워진 너와 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까웠고, 우정이라 말하기엔 너무 친밀했던 우리에게 남은 건 연애뿐. 널 만난 날이라고 생각하니까 오늘 좀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라. 고백하던 날 두근거림과 연애할 때 설렘이 떠올랐던 것 같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여서 참 좋아. 너만큼 소중한 사람은 없어. 그런 널 만난 오늘이 그래서 특별해. 20년 전에도 지금도 언제나 난 너의 연인.
우리 사귀기 시작한 지 7,300일 되는 날에 널 사랑하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