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싱어게인 2를 보고 있었다. 친구의 전화가 걸려오자 아들은 전화기를 들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뻘게진 눈으로 문을 열고 나온 아들이 흐느낀다. “00 이가 전학 간대” 며칠 전 단짝 친구인 00 이가 이사를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는데 확정된 모양이다.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이 다가가 안아주니 가만히 품에 안긴다. 거실 구석에서 한참을 친구와 톡을 주고받은 후 오늘의 감정을 글로 남기고 싶다며 노트북을 펼친다. 가만히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옛 기억이 떠올랐다.
고 1 때 같은 반이었던 주성이. 초등학교 동창이었지만 같은 반인 적 없어 얼굴만 알던 사이였던 그와 고등학교에서 만나게 되었다. 하교 길에 함께 걸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섞게 된 이후로 우린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등하교를 함께 했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나눠 먹고, 쉬는 시간에 매점에도 함께 갔다. 패션 감각이 남달랐던 그는 반팔 소매를 두 번 접어 입었고 항상 옷깃을 세우고 다녔다. 두발 규제가 심했던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 때는 머리를 기를 수 있었다.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할 때 주성이는 가방에서 빗을 꺼냈다. “야 가만있어봐. 너는 가르마를 가운데로 타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며 쉬는 시간에 내 머리를 빗겼다. “오. 괜찮은데. 요즘 멋쟁이들은 다 가운데 가르마를 탄다니까” 라며 그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우린 둘 다 음악을 좋아했다. 쉬는 시간이면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을 추천하며 이어폰 한쪽을 빼서 들려주었다. “어때 이 음악 좋지?” 서로의 반응을 기다리며, 기대하며 우린 함께 음악을 들었다. 당시에는 음반 가게에서 3000원에 원하는 곡들을 공 테이프에 녹음해 주었다. A면 6곡, B면 6곡. 총 12곡 정도만 담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선곡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은 머리를 맞대며 어떤 곡을 넣을지 함께 고심했다. 다른 곡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노래만은 정확히 기억한다.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라붐 1과 2의 주제가였던 Richard Sanderson의 <Reality>와 Cook Da Books의 <Your eyes>. 우린 테이프 하나를 서로 돌려가며 들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주성이가.
중간고사 기간에 독서실에 다니기 시작한 주성이를 따라 나도 독서실에 등록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그를 불러내 독서실 옥상에 올랐다. 그곳에서 우리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내려다 보였다. 깜깜한 운동장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옛이야기가 오갔고 우린 자주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다 먹색이던 하늘에 박힌 별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를 논했다. “야! 우리 대학은 갈 수 있겠지?”, “우리 10년 뒤에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우린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될까?” 멀게만 느껴지던 앞날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 밤 독서실 옥상에서 우리가 들었던 음악이 <Reality>와 <Your eyes>였다.
무더운 여름 주성이의 집에 놀러 가면 어머니는 얼음을 가득 채운 미숫가루를 내주시곤 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 했던가. 주성이를 떠올리면 아직도 그 행복한 맛이 혀끝으로 전해오는 것만 같다. 책상 위에는 초록색 스킨이 있었는데 바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강력했다. 미국산 화장품이었는데 친척에게 선물 받았다고 했다. 주성이에게는 늘 강하고 센 향이 났는데 이것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언젠가 지인의 집에서 그 스킨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뚜껑을 열었다. 그리운 오랜 친구의 향이었다.
1학년 1학기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전주로 전학가게 될 것 같다는 소식을 조심스럽게 전했던 날, 나는 괴로웠다. 다리가 후들거려 걷기도 힘들 정도로. 밤에 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학 가기 전까지 매일 주성이를 만나는 것뿐. 우린 걷고, 영화관에 가고, 빵집에 가고, 서로의 집에 놀러 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떠났고, 졸업 후까지 나는 종종 주성이를 그리워했다. 방학 때 시간이 되면 그를 만나러 전주에 갔고, 그때마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전주로, 그는 익산으로 대학 진학을 했지만, 방학 때를 이용해 자주 만났다. 졸업 이후에도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다가 결혼할 때쯤부터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그와 연락이 끊어진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주성이도 나처럼 가끔 내 생각을 할까.
글을 적고 있는데 아내가 다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내의 눈도 뻘게진 상태다. 아들이 쓴 글을 읽었단다. 그리고 글을 읽던 아내 뒤에서 아들은 어깨너머로 자기 글을 다시 읽다가 또다시 울먹였다고 했다. 먼저 자겠다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자리에 누워서도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단다. 잠시 쓰길 멈추고 방으로 향했다. “의찬아. 자?”, “아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들 옆에 누웠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참을 흐느껴 울고 나더니 방학 때 친구를 만나러 다녀와도 되겠냐고 묻는다. 혼자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니까 함께 가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오늘 밤 혼자 잠 못 이루고 눈물을 삼킬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릿하다.
아들이 조금 전 밴드에 올린 글을 읽었다. 00과 보낸 오늘 하루, 00과의 첫 만남과 추억, 떠나보내는 힘든 마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만남은 쉽고 이별은 어려워’란 소제목이 눈에 띈다. 00에게 낭만적인 음악을 들려주려고 누나의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준비해 나갔다는 아들은 공원 벤치에 앉아 친구가 좋아하는 Charlie Puth의 <See You Again>이란 노래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14살의 이별이 날 울린다. 슬픈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