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였던 점심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서로 아는 지인들의 근황을 묻고 깊지 않은 식견으로 여러 주제들을 떠들어대며 중간중간 나오는 저돌적인 드립(농담)들이 눈앞에 있는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었다.
직장인이 된 뒤로 나에게 점심은 업무의 연장이다. 누군가는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하나씩 보면 불편한 점 투성이다. 팀끼리 먹으러 갈 때는 상사들의 업무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밥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냥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물체로만 느껴진다. 내 돈 주고 사 먹는 점심조차 왜 이리 행복하지 않은지, 애써 무시하고 먹지만 질문 세례는 곧 나를 향한다. 점심시간에 받는 이 무자비한 폭격은 업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질문으로 물 흐르듯 이어져 그 유명한 “부모님은 뭐 하시니?”를 시작으로 취미, 학업, 연애, 주말, 친구 등 전 영역에 걸쳐 거침없이 쳐들어온다.
사적인 주제들은 사적인 사람들과 있을 땐 정말 좋은 주제가 될 수 있지만 직장에서 받는 개인적인 질문들은 꼭 취조 받는 기분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하느냐, 수동적으로 하느냐의 차이일터. “그냥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등 나의 짧디짧은 대답이 끝나면 상사들의 기승전 자기자랑이 시작된다. 차라리 이 경우가 훨씬 낫다. 그냥 들어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들어주기에도 말 하는 것 만큼이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됨을 알아야 한다.
대화하는 사람과 수직적 관계일 때에는 윗사람의 모든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질문하는 사람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당신의 불편한 호기심을 채워주고자 상대는 말하기 싫은 정보까지 억지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랫사람 또한 윗사람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야할 의무는 없다. 이는 취업 전선에 나와 면접을 보러 다녔을 때부터 생각해왔던 부분이지만 무례하고 불편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선뜻 생기지는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사람이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고자 마음을 먹어왔지만 실천하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방심하고 있는 상태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상대의 당황스러운 질문에 입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태도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번 씩 생기는 수 많은 불편한 대화에 동조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지금은 여러명이서 대화를 하다가 불편한 이야기가 나오면 슬며시 자리를 피하거나, 이야기는 들어주되 무응답으로 일관한다. 사실 주체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큰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말을 하고 있는 상대에게도 중요한건 본인이 현재 말을 하고 있는 그 행위 자체와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내 역할은 충분하다. 대답하기 싫은 질문은 웃음으로 넘기거나 “글쎄요”, 혹은”제가 꼭 대답해야하나요?” 정도로 마무리 짓는다.
“요즘 애들은 밥 사준다는데도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대화 방식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직접적으로 8,000원 정도의 밥값과 40분의 감정 소모를 맞바꾸자고 누군가 제안한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겠다. 맛있는 밥을 먹으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정신건강과 몸건강에 훨씬 이로울 듯 하다.
코로나가 발생한 이후로는 따로 도시락 배달을 시켜서 회사에서 혼밥을 즐긴다. “회사에서 혼밥하면 좀 그렇지 않아?” 와 같은 질문을 친구들에게 많이 받는다. 나 역시 처음엔 괜히 눈치도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움찔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시간 자체가 너무나 자유롭게 느껴진다. 정신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밥 먹을 때마다 날 찾아오던 부정적인 감정은 새로운 주인을 향하여 떠났다. 밥을 먹고 남는 30분가량의 시간에 책, 넷플릭스, 인터넷 기사 등을 본다. 나는 나에게 자유를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