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를 고민할 때 고려할 수 있는 기준
집에서 함께 살았던 가족, 일주일에 여러 번 만났던 친구들,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 평범한 감성팔이가 시작될 것 같은 이 인간관계 속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을 적어본다. 만 29세가 된 나는,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설렘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지치며, 그리움을 느끼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고, 만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면서 "나이가 들면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거야"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물론 직장, 이사, 시간이 맞지 않는 이유로 만남이 어려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인간관계의 변화는 점차 체감된다. 이 글을 통해 이런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와 비슷한 독자들이 있다면 도움되길 바란다.
먼저, 인간관계를 내 방식대로 정의해보자. 인간관계란 한 개인과 다른 사람 또는 집단 사이에서 서로의 위치를 인지하고 동의하는 관계다. 예를 들어, A가 B를 친구로 여기지만 B는 A의 존재조차 모른다면, 그들 사이에는 인간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책의 저자를 스승으로 여기더라도, 그와 나 사이에 실제 인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자녀가 태어나면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형성되고, 학교에 가면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생긴다.
또한, 나와 회사 사이에도 관계가 형성된다. 개인 대 개인처럼 섬세한 관계는 아니지만, 나는 회사의 소속이 되고, 회사는 나에게 역할을 기대한다. 이처럼 부모-자녀, 교사-학생, 임대인-임차인, 고용인-피고용인, 회사-직원 등 다양한 관계가 인간관계에 포함된다.
사실, ‘인간관계’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아직 찾아보지 않았다. 이 글을 마친 후 찾아볼 생각이다.
인간관계의 유지, 개선, 단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출발점은 ‘나’라는 개인에서 시작된다. 인간관계가 지속되려면 나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를 유지하려 할 것이고, 손해가 되는 관계는 멀리하려 한다. 친구와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행복감을 느끼는 관계는 이익이다. 반면, 친구가 매번 돈을 빌려달라고 하여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관계는 손해다.
이제야 ‘자본주의와 인간관계’라는 주제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자산에서 부채를 뺀 것이다. 이를 인간관계에 대입해보자. 인간관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이익이 되면 그것은 ‘자산’이고, 손해가 되면 ‘부채’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을 키워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인간관계에 대입하면, 나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를 더 많이 만들고 유지하려 노력하며, 손해가 되는 관계는 단절하거나, 개선할 수 있으면 보완해야 한다.
물론, 자본의 시각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것만이 유일한 접근법은 아니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자본의 개념과 함께 저울에 올려 나의 만족도를 균형 있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요지는 자본을 하나의 도구로 삼아 인간관계에서 더 나은 삶을 그려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 희생, 그리고 더 고차원적인 욕구들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결국, 인간관계는 단순히 이익과 손해로 나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소들을 아우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당분간 이 글에서 자본주의 시각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는 지금 사회에 기여하고 성장하기 위해 내 인간관계를 조정해야 한다고 느낀다.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며 술자리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나의 성장을 위한 방향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고자 한다. 자본이 커지는 방향으로 인간관계를 조정하고 싶다. 부채를 감수할 만큼의 이익이 있다면 유지할 것이고, 금전적 이득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가치관에 벗어나거나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단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