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도 낙원은 아니더라

경력이 실력은 아니다

by 희원다움

20년 전, 처음 승무원이 되었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쁨은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생각보다 빨리 식어버렸다. 남보다 빨리 일을 배우고 금방 현장에 적응해 버리는 나의 성향이 오히려 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그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울 때, 나는 ‘이 정도면 됐지’라는 생각에 안주해 버렸다. 진짜 전문성은 그 지루한 반복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디테일을 채울 때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단계에 가기도 전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자연스럽게 또 다른 먹거리를 찾아 구직 사이트를 열거나 딴짓을 시작했다. 나는 이 도망의 과정을 ‘도전’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포장했다. 새로운 길에 도전해 합격할 때마다, 나는 내가 실행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스스로를 반복되는 일상에 갇히지 않고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개척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퇴사하며 그 자리에 남아있는 동료들을 볼 때면 솔직히 쾌감을 느꼈다. 안주하는 그들은 ‘루저’처럼 보였고, 박차고 나가는 나는 용기 있는 주인공 같았다. 그렇게 네 번의 커리어를 갈아치우며, 어느덧 10년 차 간호사가 되었다.


솔직히 한 곳에서 10년을 지내며 나는 수차례 슬럼프에 빠졌다. ‘왜 예전만큼 도전하지 못하지? 나이 때문인가?’ 사그라든 열정을 탓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나는 참담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경력이 실력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거쳐간 직업명을 떼고 ‘나는 누구를 위해, 어떤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가’를 자문해 보았다. 하지만 그 질문 앞에 당당히 내놓을 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나 무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커리어 전환 말고는 이렇다 할 '성과'를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떠난 내가 아니라, 그 시간을 견디며 견고히 자신만의 전문성을 구축한 사람이 진정한 승자였다. '나는 왜 그토록 도망치기만 했을까?' 자책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미국의 비즈니스 전략가 Tyler Cerny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인생의 목적은 나를 만든 창조주의 뜻에 따라 타인을 돕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가진 달란트로 타인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창조주가 우리를 만든 이유라는 것이었다. 그 메시지를 곱씹으며 지루했던 내 일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창조주가 나를 10년간 같은 자리에 두신 이유는 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라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실질적인 가치를 발견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도망친 곳도 낙원이 아님을, 20년의 방황 끝에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성과를 만들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시스템을 구축하려 한다. 그것이 20년의 방황을 끝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진짜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