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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 Oct 26. 2020

신세계

다이빙 하기 딱 좋은 날씨네  1



1년 365일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이 있다.


아 다이빙하고 싶다


내가 그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 건 2008년 8월이었다. 2008년 5월에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7월 중순쯤 태국으로 넘어가면서 내 여행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본래는 유럽 두 달, 동남아 한 달을 계획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유럽 두 달은 얼추 계획대로 돌아보고, 여행했던 것 같은데, 동남아 한 달은 '동남아' 한 달이 아니라 '태국' 한 달로 완벽하게 계획이 수정되었다. 게다가 그 한 달 마저도 2주 정도를 태국의 꼬 따오에 투자했고, 이 여행은 내 인생 최초의 가장 즉흥적인 여행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여행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이 가방에 운동용 크로스백 같은걸 하나 더 들고 다녔다. 배낭과 보조가방을 합치면 23kg 정도.

아직도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그 열기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민소매 티와 반바지를 입고, 가벼운 플립플랍을 신고, 20kg이 넘는 배낭을 멘 채 위풍당당하게 공항 밖으로 첫걸음을 내딛던 그 순간. 유럽에서의 고된 여정(빵 먹기 싫어서 울었다던가 하는)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가는 평온함. 내가 이렇게나 더위와 열기를 사랑하는구나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감정. 사실 태국은 2007년에 이미 한 번 여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자유여행이었음에도 여행의 가성비를 위해 스케줄 따라 다음날은 어딜 가고, 그다음 날은 어딜 가야 하고 하는 생각만 해댔다. 내게 맞는 여행이라기보다는 그냥 남들 다 가는 곳은 한 번 가봐야 하는 여행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때의 아쉬움 때문에 2008년에는 이번만큼은 좀 더 느끼는 바가 많은 나만의 여행을 하자고 다짐했는데, 이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지금의 카오산과는 사뭇 다른 2008년의 카오산 로드. 지금보다 좀 더 여행자들의 거리 같았다.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로비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던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친해졌는지 모르겠다. 그냥 우리는 모두 여행자로서 쉽게 말을 섞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I의 사람인데 여행만 가면 E가 되는 것 같다) 구체적인 일정이 없는 여행이라는 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근처 다른 나라를 갈 계획은 있었지만 세부적인 일정이 없었기에, 게스트 하우스에서 친해진 사람들과의 동행도 쉽게 이루어졌다. 그들의 '같이 가자'는 말은 계획대로 일정을 소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깔려있는 내 마음에 쉽게 정착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매일 밤 술 한 잔 기울이며 여행 얘기를 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왜 하필 스쿠버 다이빙이었느냐 하면, 게스트 하우스에서 친해진 언니가 꼬 따오에 계신 한인식당 사장님께 물건을 전해주러 갈 일이 있었고, 가는 김에 스쿠버 다이빙을 한 번 해볼 예정이라서였다. 그리고 언니가 꾸려낸 꼬 따오 출정단(?) 멤버가 무척 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사람을 보고 계획을 따른 거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남들이 좋다 좋다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으로 꼬 따오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주로 뭘 위해 가는 섬인지도 모른 채 일단 따라나섰다. 한국에서 백만 원 정도 하는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태국에선 삼사십만 원 정도면 딸 수 있다는 사실에 내친김에 자격증도 하나 만들고 오자는 생각까지 안고 갔다.

춤폰 피어. 저 끝까지 걸어가서 롬프라야 보트를 탔다. 지금은 아마 다리가 좀 더 안전하게(?) 바뀌었을 거다.

꼬 따오는 방콕에서 오후 8시쯤 롬프라야 버스를 타고 춤폰으로 이동해 아침 7시쯤 배를 타고 두어 시간 더 이동해야 도착하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오토바이로 섬 한 바퀴를 다 돌아보는데 1시간도 걸리지 않고, 한 달만 섬에 머물면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알게 될 것 같은, 그런 작은 섬. 지금은 내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한적한 시골 같은 섬 꼬 따오. 피곤에 잔뜩 쩔어서 퀭한 눈으로 피어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외국인들이 커다란 장비 가방을 짊어지고 오가는 것은 굉장히 낯선 풍경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새로운 세계. 나는 그렇게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다리 끝에 보이는 롬프라야 보트.

내가 스쿠버 다이빙을 직접 해보기 전까지, 내게 스쿠버 다이빙은 그저 체험으로, 저 예쁜 바다에 갔을 때 물속에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에 불과했다. 2007년 여행에서 푸껫을 방문했을 때도 체험 다이빙만 알아봤지 자격증을 딸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체험 다이빙도 같이 갔던 동생만 했다.) 스쿠버 다이빙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졌던 것은 첫 번째로, 나는 바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산이고 바다고 그냥 멀리서 보는 것만 좋아했지 직접 체험하는 걸 즐길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바다는 모래가 싫었다. 발바닥에 엉겨 붙는 모래알이 금방이라도 입안으로 튈 것 같았고, 바닷물에 젖은 몸을 말리면 몸에 남는 그 끈적거림이 싫었다. (지금은 바닷속에 못 들어가서 안달 났다;;)

두 번째는 고가의 레포츠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었다. 스쿠버 다이빙은 비싸다. 맞다. 분명 비싸다. 요즘엔 코스 비용도 많이 저렴해지긴 했지만, 2008년에만 해도 한국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한다는 건 나이가 좀 있는 해병대 출신의 애들도 좀 키워놨고, 돈도 좀 있고, 여가 생활을 즐기는 아저씨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이 됐었다. 물론 그건 나의 크나큰 편견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단순 취미를 위해 몇십만 원짜리 코스를 듣고 자격증을 딴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거기다가 장비는 또 어떻고. 내 장비를 마련하려면 드는 돈이 어마어마한데, 그걸 학생 주제에 무슨 수로 산단 말인가.

세 번째 이유는 주변에 스쿠버 다이빙 경험자가 없었다는 거다. 이렇게 좋은 걸 내 주변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 내 주변에는 다이버들로 넘쳐나지만 2008년까지만 해도 내 친구 중 그 누구도 스쿠버 다이빙을 하지 않았다. 경험자가 없으니 당연히 정보도 없고, 이 신세계에 무지했을 수밖에.


그래서 나는 우리 중 선두주자가 되기로 했다.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은 보통 오픈 워터 코스를 거쳐 어드밴스, 레스큐, 마스터, 강사 순으로 간다. PADI 기준이긴 하지만, 다른 협회의 자격증 발급 과정도 비슷하다. 처음 나는 딱 오픈워터 코스 자격증만 딸 생각이었다. 18미터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고, 기본적인 스킬도 모두 배우고. 그 이상 내려갈 일이 뭐 얼마나 있을까 싶어 우선은 오픈워터 코스만 진행했다. 그리고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대부분의 차는 픽업트럭이다. 개인차보다는 업체용 차량이 더 많다.

나이트 버스와 2시간의 배를 타고 꼬 따오에 도착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도착했는데(게다가 뱃멀미도 심하게 했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코스 비디오 수업을 시작하더니, 대뜸 책을 주면서 문제를 풀라고 하고, 생전 듣도보도 못한 다이빙 용어들의 잔치와 숫자 쪽으로는 영 꽝인 내 머리가 감압 계산과 싸우느라 방전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갔다. 첫날 이론 수업만으로 이미 모든 체력을 다 갉아먹은 듯, 숙소에서 기절하고 나니 금세 꼬 따오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둘째 날은 수영장에서 제한 수역 수업을 진행했는데, 말 그대로 물이 있는 제한된 장소에서 다이빙 관련 스킬을 익히는 거였다. 바다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수영장은 그럭저럭 좋아했던 내게 수영장 수업은 사실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수영하는 걸 즐기진 않지만 수영을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웻 슈트를 입으니 물에 둥둥 뜨기도 하고. 두려울 건 없었다. 하지만 허리에 웨이트(납덩어리)를 차고, 호흡기를 입에 처음 물고 수영장 물속으로 가라앉았을 때는 입으로만 호흡해야 한다는 사실에 답답함이 엄습해왔다. 물 밖에서는 입으로만 숨 쉬는 게 어렵지 않았다. 부담스러울 것도 없었고, 아 뭐 쉽구만, 하며 수영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는데, 코에 공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느낌을 갖고 입으로만 호흡한다는 건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그 감각에 익숙해지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던 것 같다.


꼬 따오 싸이리 비치. 가장 대중적(?)인 해변가다.


체험 다이빙과 자격증 코스의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감각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 체험 다이빙은 아주 간단한 스킬만을 알려준다. 수압으로 인한 고막 손상이 생기지 않게 이퀄라이징을 하는 방법과 물속에서 호흡하는 방법(그냥 숨을 훅 들이마시고 훅 내쉬면 안 된다), 마스크에 물이 찼을 때 물을 빼는 방법이나, 몸이 안 좋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상황을 알리는 수신호 같은 것 정도. 조금 더 가르쳐 준다면 상승과 하강 수신호 정도? 헌데 자격증 코스는 모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스킬을 알려준다. 물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법부터, 발생 가능한 상황들을 연출해 스킬을 실행하게끔 한다. 마스크를 벗었다 다시 쓰고, 마스크에 일부러 물을 가득 채웠다가 빼내고, 호흡기가 입에서 빠졌을 때 호흡기를 다시 되찾아 물고, 발에 쥐가 나거나 함께 다이빙하던 버디를 놓쳤을 때 해야 하는 행동 등등. 총 4번의 다이빙을 하면서 오픈워터 수강생은 바쁘게 강사를 쫓아가야 한다. 그래서 체험 다이빙을 하고 나면 "와 예쁘다"가 남지만, 오픈워터 코스를 하고 나면 "아 힘들어 죽겠네"가 남는다. 나도 그랬다. 예쁜 물고기를 구경한 건 기억도 나지 않고, 그냥 힘들었던 기억만 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재밌는 척 허세 떠느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진짜 너무 힘들어서 아 이걸 계속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근데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정말 아무에게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거든. 사람들 전부 내가 오픈워터 코스를 엄청 재밌고 즐겁게 한 줄 알고 있을 거다.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어떻게 마스터까지 하게 되었을까. 결국 마스터까지 오게 된 데에는 어드밴스의 힘이 컸다. 아니, 어드밴스를 하게끔 만들었던 강사의 힘이 컸다. 나는 18미터로 만족했는데, 오픈워터 코스가 거의 끝날 무렵, 같은 다이빙 샵의 우리를 가르치지 않은 다른 강사가 말했다.



오픈워터 나부랭이가 다이빙에서 무슨 재미를 느껴.
다이빙의 진짜 재미는 어드밴스부터지!



그래, 그때의 나는 허세가 가득했고, 유니크함을 사랑했다. 또한 우리 중(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닌 한국에 있는 나와 내 친구들 중) 선두주자가 되기로 한 이상 자존심을 걸고 재미를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오기로 했다. 나는 오픈워터 나부랭이이고, 재미를 느낄 수 없었기에 어드밴스 자격증을 따고 재미를 느껴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강사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진짜 재미가 어드밴스부터라고? 어드밴스 했는데 재미없으면? 그럼 어쩔 건데? 23살의 나는 그랬다. 그렇게 반사회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오픈워터 코스가 끝난 후 임시자격증을 받고 파티를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우리들은 달콤한 이틀의 휴식을 즐기고, 어드밴스 자격증에 도전했다. 어드밴스는 이론 없이 필수 다이빙인 딥 다이빙, 수중 내비게이션을 포함해 다섯 번의 다이빙을 진행한다. 첫 다이빙은 수중 내비게이션이었는데 속으로 욕을 천 번쯤 한 것 같다. 재밌다며? 진짜 재미는 어드밴스부터 라며? 시작부터 노잼인데? 핵노잼인데? 힘들기만 하고, 어렵기만 한데? 어드밴스 첫 번째 다이빙은 그랬다. 머릿속에 그저 노잼노잼 핵노잼만 떠오르고, 체력적으로 힘들기만 했다. 두 번째 다이빙은 그것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덜 힘들었다. 재미있다거나, 예쁘다는 감상보다는 그래도 물속에서 움직이는 게 오픈워터 때보다는 낫다고 생각되는 정도. 그런데 사실, 내가 이렇게 재미없고 힘들었다는 감상을 줄줄이 적어놓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내가 다이빙을 못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중성부력을 유지하는 거나(호버링), 몸을 컨트롤하는 것이 결코 남들보다 뒤처지거나, 못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다들 내가 무척 즐겁게 다이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진짜 다이빙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건, 정확히 어드밴스 다이빙 3장, 그러니까 코스의 세 번째 다이빙을 나갔을 때다.


바닷속에도 별이 있고, 하늘에도 별이 있고.


꼬 따오의 석양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붉은 하늘이 다양한 감정을 당신에게 선물해 줄 것이다.

세 번째 다이빙은 나이트 다이빙이었다. 밤에 하는 다이빙. 그냥 다이빙도 무서운데 밤에 하는 다이빙이라니. 그냥 바다도 무서운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라니. 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정말 예쁘다고. 역시나 반발심이 들었던 나는 안 예쁘기만 해 봐라, 하며 자신 있게 밤바다에 뛰어들었다.

그곳은 신세계 중에서도 신세계였다. 아마도 밤바다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우주일 것이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는 낮 보다 고요했다. 작은 랜턴 하나를 손에 쥐고, 강사가 든 두 개의 랜턴 불빛을 따라 유영했다. 초반에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유영해가는 강사 뒤를 부리나케 쫓아갈 뿐이었다. 꽤 넓은 샌드 지형을 찾아 간 강사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배 위에서 강사가 브리핑했던 대로, 모두가 무릎을 꿇은 것을 확인한 뒤, 우리는 랜턴을 껐다. 랜턴을 모두 끄자, 정말 새까만 어둠만 보였다.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은 어둠. 내 귀에는 내 호흡소리만 들려왔다. 뽀글뽀글 숨 쉬는 소리가, 버블이 상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몇 번의 호흡이 지나자, 곧 눈 앞에 어둠 사이로 반짝이는 초록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 앞에 우주가 펼쳐지고 있었다. 입수하기 전, 강사는 배 위에서 브리핑을 하며 말했다. 우리는 오늘 우주를 볼 거라고. 바닥에 앉아 랜턴을 끄고 손을 마구 흔들거나,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해 보라고. 그러면 우주가 보일 거라고.

그랬다. 정말로 있었다. 우주가.

나는 손을 뻗어 앞을 휘적거렸다. 내 손 끝에서 초록색 플랑크톤들이 발광하며 빛을 뿜어냈다. 아주 작고, 예쁜 별빛들. 그건 별빛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의 손 끝에서 퍼져나가는 별빛. 마찰에 반응해 빛을 뿜어내는 플랑크톤이라니. 이게 우주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때 처음으로 진짜 다이빙이 재밌다고 느꼈다. 그냥 재밌다고만 표현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아주 진귀하고,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플랑크톤을 보고 나자 안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유영을 하며 밤바다를 구경하는데 내 앞에 가는 강사의 핀 끝에서 별빛이 퐁퐁 솟아났다. 무서움,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나는 랜턴을 끄고 강사의 핀만 보며 유영했다. 그 별빛을 계속 보고 싶어서.

30분 남짓 다이빙을 하고, 슬슬 보트 주변으로 돌아왔을 때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 수면 쪽을 바라봤다. 아주 커다란 빛망울 같은 것이 바다 표면에 일렁이고 있었다. 저게 뭘까 하는 마음에 온 집중력을 그 표면에 쏟아냈는데, 조금씩 수면에 가까워지자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건 달빛이었다. 완전한 보름달은 아니었지만 커다랗고 환한 달이 수면에 비치고 있었던 거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입수할 때 보다 더 설레었다. 그리고 무심코 휘두른 랜턴의 불빛이 수중을 가르자, 놀랍게도 수중에 둥둥 떠 잠자고 있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사실 자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냥 밤이니까 자고 있겠거니..)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물고기들이 무중력의 바다에 가만히 떠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바닷속에서 빛은 퍼져나가지 못한다. 올곧게 뻗어지는 빛줄기 그대로의 범위만큼만 빛이 닿는다. 그래서 바닷속 허공을 가르는 내 랜턴의 빛줄기는 그 바다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처럼 비춰낸다. 물고기 그림자가 끝도 없이 보였다. 푸질리어 떼처럼 빼곡한 건 아니었지만 저 멀리 닿는 빛줄기의 끝에도 물고기 그림자가 보였다. 우주생물 같았다. 나는 그 순간 우주인이었다.

잔뜩 흥분된 마음을 안고, 천천히 상승했다. 수면에 다다랐을 때, BCD에 공기를 채워 넣고 입에서 호흡기를 떼며 바닷물을 먹지 않기 위해 배영 하듯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이번엔 내 위로 별이 쏟아졌다. 사방에서 "우와!", "대박!"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깨끗하고, 청명하게 느껴지는 밤하늘, 그리고 그 밤하늘에 흩뿌려진 수많은 별, 그 별들이 바다에 누워있는 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너무 많이 반짝거려서 어떤 별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시선을 이리저리 두느라 우왕좌왕할 만큼, 그렇게 별이 쏟아졌다.


밤바다는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올바른 교육과정을 거치고 주의사항을 잘 지키며 다이빙한다면 분명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정말 재밌었다. 낮에 했던 다이빙보다 호흡도 훨씬 편했고, 입수할 때를 제외하면 고요해서 심리적으로도 편안했다. 조류도 별로 없었고, 오히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기분도 느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다이빙 진짜 재밌어,라고 생각될 만큼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올라온 기분이었다. 숙소에 돌아가서도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설레는 맘으로 사람들과 나이트 다이빙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처음으로 나는 거짓말하지 않고, 다이빙이 얼마나 재밌는 가를 말할 수 있었다.

어드밴스 코스 마지막 다이빙은 아침 6시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전날의 피로가 다 가시지도 않았지만, 나는 다이빙을 하면서 처음으로 설레는 마음, 빨리 다이빙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보트에 오를 수 있었다. 아침 다이빙은 대부분 먼바다로 나가는 딥 다이빙이었다. 처음으로 30m까지 내려가는 날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나이트 다이빙 한방으로, 바다에 대한 두려움, 공포심 따위가 호기심,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내게도 여유가 생겨서, 바닷속 주변 환경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강사 핀 밖에 못 보던 좁디좁은 시야가 그제야 조금 확장된 거다. 그 시야가 확장되면서 내 다이빙 세계도 확장되었다.


이렇게 좋은 걸 나만 할 수 없어.

호흡하면 나오는 버블에 비친 내 모습을 찍어본 건데, 버블이 꼭 해파리의 머리(?) 같아서 좋다. 동글동글 귀여운 버블.


어드밴스 코스가 끝난 후, 그냥 꼬 따오를 빠져나오기는 너무 아쉬워서 펀 다이빙을 한 번 했다. 아무런 교육 과정 없이 즐기기만 하니 안 그래도 재밌어진 다이빙이 더 재밌었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까지 생기자, 슬슬 욕심이 났다. 중성 부력을 조금 더 잘 맞추고 싶고, 자세를 더 바르게 했으면 좋겠고, 공기를 좀 더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누고 싶어 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좋은 게 있으면 같이 하고 싶어 했다. 혼자만 알고 있고, 혼자만 좋아해 봤자 아무런 재미도 없었다. 같이 해야 재미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어야 좋아하는 것을 유지하고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심지어 첫사랑도 친구랑 같이 좋아하며 공유했다. 그게 라이벌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다음 목표는 레스큐를 거쳐, 마스터 과정을 해내는 거였다. 다이빙을 하는 내내 우리를 신경 써줬던 마스터들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그들이 우리에게 다이빙이 얼마나 재밌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기 좋았다. 마스터를 하고 나면 당연한 수순으로 강사 자격증까지 딸 생각이었다. 2008년 여름, 나는 2008년 겨울에 다시 꼬 따오에 돌아갈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2008년 겨울에 다시 꼬 따오에 갈 수 없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9월, 한국에 도착하고 열흘이 조금 지났을 때, 아빠가 돌아가셨다. 그렇게 내 신세계는 잠깐 멈춤과 더 이상의 업그레이드 불가 판정을 받았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로 생계가 위험해지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감정의 회복이 더뎠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도 꽤 오랜 시간 밤마다 아빠가 그리워 울었다. 1년이 지난 2009년 여름까지, 약 1년 동안 나는 꿈에서 숱하게 배낭을 싸고 비행기를 타고, 다이빙을 하기 위해 떠났다. 정말 꿈에서 배낭을 몇 번이나 쌌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여행을 핑계 삼아 2009년 여름 또다시 꼬 따오를 방문했다. 즐거운 사람들을 만나서 다이빙을 즐겼고, 나는 다이빙을 해야만 한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 해 겨울. 비로소 나는 다이브 마스터 트레이닝 과정을 위해 꼬 따오로 떠났다. 3개월짜리 오픈티켓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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