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빙 하기 딱 좋은 날씨네 2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비행기를 탔던 걸로 기억한다. 최대 3개월을 예상하고 갔지만 짐은 배낭 하나. 15kg 남짓 됐던 것 같다. 벌써 11년이나 흘러서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그리 무겁지 않은 짐으로 갔던 건 분명하다. 방콕에서 3~4일 지내면서 함께 꼬 따오에 갈 사람을 모았다. 꼬 따오에 혼자 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오픈워터 할 사람을 몇 명 모아서 함께 내려간 꼬 따오는 여전했다. 사실 2009년 8월에도 이미 따오를 방문한 바 있었으니, 5개월여 만에 다시 찾은 거라 달리 변할 것도 없었다. 변화가 빠른 이 시대에 꼬 따오는 유난히도 변화가 더딘 축이었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지금은 또 많이 변했다.)
도착해서 곧장 레스큐, 마스터를 등록하고 장비부터 마련했다. 엄마카드 찬스를 써서 컴퓨터(다이빙용 시계)와 5mm 웻 슈트를 마련했다. 핀(오리발)과 마스크는 어드밴스 자격증을 딸 때 이미 장만했다. BCD(부력 쟈켓)와 레귤레이터(호흡기) 장만은 뒤로 미뤘다. 그렇게까지 고가의 장비를 한 번에 마련할 여건은 안되었다. 나도 염치란 게 있어서 엄마 찬스를 더 써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간지템(?)을 장만하고 나니 제법 다이버 같은 태가 났다.
빠르게 레스큐 코스를 마치고, 마스터 트레이닝 과정을 시작했다. DIVE MASTER TRAINING이라 줄여서 DMT라고 불렀다. DMT 과정을 다 마치고 시험에 통과하면 DM, 그러니까 DIVE MASTER가 되는 것이었다. 마스터 과정은 생각보다 시간 투자와 노동력 투자를 요하는 일이었다. 마스터부터 프로에 속하기 때문에 (레스큐까지는 아마추어에 속한다) 본인의 다이빙 스킬뿐만 아니라 다이빙을 가르치는 강사의 보조역할과 다이빙을 배우는 학생의 본보기가 될만한 자세까지 모두 배워야 했다. 바다 수영이라던가, 응급 상황 시 대처하는 법은 물론이고, 바다 지도 보는 법이라던가, 바다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 까지. 사실 어드밴스까지는 크게 수영 실력을 요하지도 않고, 체력적인 관리가 따로 필요하다고 생각될 만큼 힘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프로가 되는 과정은 확실히 달랐다. 체력적인 부분이 부족하면 금방 낙오되기 십상이었다.
DMT는 즐겁기만 한 과정은 아니었다. 필기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받기도 했고, 3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따오에 있으면서 각종 사건 사고가 있었던 터라, 분명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더더군다나 마스터하면서 구남친을 만나서 3개월의 기억에 늘 구남친이 섞여있다. 다소 끔찍한 기억이 아닐 수가 없다;;)
DMT과정을 거치면서 깨져버린 건 강사에 대한 환상이었다.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이빙을 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으로 여기저기 다이빙을 추천했는데, 마스터 과정에 들어서자, 그런 것들의 진심이 퇴색해버리는 느낌이었다. PADI 마스터 교재에서 마케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대상에게 어떤 상품을 팔아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가 친절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니,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나도 참 뭐가 그렇게 베베 꼬여있는 인간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싫었다. 돈이 되지 않으면 그 분야는 망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싫었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좋아서 여기저기 다이빙의 아름다움을 전파한 내 순수한 의도가 더럽혀지는 것 같았다. 나도 안다, 어지간히도 꼴값 떤 거. 하지만 그땐 그랬다. 24살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분명 강사까지 생각하고 갔는데, 나는 교재에서 마케팅 파트를 보자마자 그 생각을 버렸다. 강사는 안 할래. 그냥 마스터로 내 몸 챙기고, 사람들에게 재밌는 것만 알려주면서 그렇게 다이빙할래. 마스터 과정 다 끝나면 스킬은 늘겠지.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강사 생각을 접고, DMT과정을 지내면서 처음으로 태국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경험했다.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색달랐다. 따뜻한 동남아의 바닷속에 산타 모자를 쓴 다이버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춤추고 노는 여름날의 크리스마스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크리스마스라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내 예상보다 따오에 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오는 한국인은 많지 않았다.
내가 여름에 따오에서 다이빙을 했을 때처럼 많은 한국인들이 오리라 예상했던 것 과는 달리, 12월은 한가했다. 아니, 내가 있는 내내 한가했다. 다이빙 샵에 근무하는 사람들끼리 다이빙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어쩌다 코스를 진행하는 학생이 와도 한두 명 정도였다. 3개월 동안 다이빙할 생각에 들떴던 나는 다소 김이 빠지기도 했다. 게다가 나는 뱃멀미가 심했기에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학생 케어는커녕, 내 몸 하나 케어하는데 정신없어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래 가지고 서야 무슨 마스터를 하겠다고. 그래도 포기하지는 못하니까 매일 멀미약을 두 알씩 먹고 배를 탔다. 열흘 가까이를 매일 약 먹고 배를 타자 머리카락이 빠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DMT 과정이 끝나고 나를 뒤돌아봤다. 3개월 동안 100 깡의 다이빙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아쉽게도 100 깡은 하지 못했다. 이미 몇십 회인가의 펀 다이빙을 하고 간 터라 토털 100회는 이루었지만, 3개월 동안 100회는 채우지 못한 거다. 그래도 60회 이상은 하긴 한 거 같은데... 아무튼, 모든 과정을 무사히 끝내긴 했지만 DMT 과정은 내 예상과 너무 달라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스터 과정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의 내 마음과 끝날 때의 내 마음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분명 구남친의 영향도 있었을 것...)
좋은 기억으로 점철된 DMT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간에 친구가 자격증 따러 놀러 오기도 했고,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햄버거를 사다 먹기도 하고, 좋은 뷰포인트를 찾아가 맥주를 한 잔 하기도 했다. 주목적이었던 마스터 과정보다 지금은 그런 사소했던 것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 행복을 책임지던 것들은 사실 어떤 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하게 순간을 즐기기 위한 것들이었다. 밤하늘, 밤바다, 별, 달, 시원한 맥주 한 잔. 여름에 보낸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바로 그런 사소로운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