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미처 몰랐다. 죽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던 인생의 끝이라 생각했던 시간이 새로운 시작이자 출발 지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해 주지 못해 늘 미안하고 가슴 아팠던 아들의 어린 시절 경험들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특별한 스토리의 재료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경험들이 꿈을 키우고 세계를 품으며 유능하게 성장할 첫 시작이자 작은 씨앗이 될 줄은.
그리고 그때는 정말 몰랐다. 15년이 흘러 같은 공간에서 지나온 시간을 아름답게 추억하며 그간의 여정을 글로 엮게 되는 날이 올 줄은.
2-1.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
2007년 4월 5일. 만 서른 살을 갓 넘긴 나는 일곱 살 어린 아들과 한국을 떠나기 위해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부모님께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는 동안 뭘 잘못해 이혼 후 싱글맘으로 우리나라를 도망치듯 낯선 길을 떠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들을 위해 가정만큼은 절대 깨고 싶지 않았던 간절함과는 달리 모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어떤 결정도 스스로 내릴 수 없이 무기력해진 딸을 대신해 아직 젊으니 이쯤에서 그만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는 부모님의 결단이 당시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좋은 곳이 있다니 몇 달간 해외로 나가 여러 시달림으로부터 벗어나 머리라도 식히고 오라는 격려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은 채 염려와 두려움만이 밀려왔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곳으로 떠나지만 아무런 설렘도 의지도 없이 이제부터 혼자 아들을 어떻게 키우나에 대한 막막함과 걱정만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냥 남들처럼 살던 가정이었는데 왜 아빠를 다섯 살부터 가끔 보게 되었는지 왜 자신을 보러 오지 않는지 이상하게도 아들은 묻지 않았다. 다만 왜 엄마랑만 미국에 가느냐고 물을 뿐이어서 “우리, 영어 잘해서 돌아오려고”라며 함께 사진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 대답은 남편은 두고 아이와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국 가는 것으로 주위에 포장된 그럴듯한 명분이기도 했고 다시 한국 땅을 밟을 때는 좀 더 당당해지고 싶은 바람이기도 했다.
지금도 ‘앞으로 울지 않기’라고 파일명을 적어놓았던 그때 사진을 가끔 보곤 하는데, 끝이고 도망이라 생각한 낯선 땅으로의 떠남에 두려워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앞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과 부모로 또 한 사람으로서 홀로서기하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 이어질 거라고는 당시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출처 : 픽사베이
처음 밟는 미국 땅인 하와이에서의 적응 과정은 쉽지 않았다. 빅 아일랜드섬인 코나(Kona) 국제공항에 도착해 입국 절차를 밟으며 First name(이름)과 Last name(성)의 차이를 몰라 처음(First)에 성을 적어야 하니 둘을 반대로 작성한 것을 시작으로 젊은 싱글맘의 미국 입국은 여러 오해를 불러와 거절될 수 있는 두려움을 안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가게 된 목적지는 전 세계 160여 국 600여 지역에 캠퍼스가 있는 열방대학교(University of the Nations)란 곳의 메인 캠퍼스이자 예수전도단(Youth With a Mission)이라는 국제 선교단체의 본부였다.
3개월간 영어도 배울 겸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코스를 하러 간다는 것 외에 지낼 곳이 어떤 단체인지 얼마간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곳의 자연, 사람, 프로그램 등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어 실력도 미국 생활 경험도 없던 터라 첫날부터 아이와 생활하는 모든 일상이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싱글맘과 아들이 함께 온 미국인 두 가정과 한 방을 사용하게 되면서, 어느 침대를 사용할 지에서부터 방에서 컵라면은 먹어도 되는지 그리고 하나뿐인 화장실은 어떤 순서로 사용하며 청소는 어떻게 나눠서 하는지 등 하나부터 열까지 안 되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무척 애를 먹어야 했다.
단어 하나 내뱉는 게 너무 스트레스인 엄마에 반해, 아들은 동갑내기 룸메이트와 말이 별로 필요 없는 블레이드 팽이 같은 것으로 어느새 친구가 되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도착한 지 일주일쯤 되었던가.
건널목 없는 도로에서 아들이 내 손을 갑자기 놓고 길을 건너다 내리막길을 달리던 차의 사이드미러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가 순식간에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니 사이드미러는 박살 나 있고 아이는 울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단 1초라도 빨리 부딪혔다면 대형 사고가 날 뻔했지만 정말 다행히도 큰 외상은 없었으니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사고 보험 처리가 마무리되어 가던 몇 주 후에는 아토피도 아닌 원인을 모르겠는 얼굴과 온몸을 뒤덮은 아들의 심한 발진에 못 긁게 하느라 고생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때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망고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두 번이나 걸려 캠퍼스에서 별명이 ‘망고 알러지’였는데, 더운 나라에서 피부병까지 걸리니 내 마음도 우울증에 화병까지 더해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도 편한 마음으로 갈 수 없던 경찰서와 병원 등을 드나들며 주위 도움을 받아 아이를 돌보는 동안 왜 낯선 나라에 와서 이런 고생까지 해야 하는지 마음은 무너졌고 양육에 대한 부담감은 커져만 갔다.
그 부담감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과정에서 더 커졌는데, 캠퍼스 내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이제 만 6세 된 아이를 캠퍼스 밖 공립학교(Public School)에 보내야 했다.
몇 달간 아침 6시 반마다 안 가겠다고 우는 아이를 등에 업고 10여 분을 걸어 내려가 겨우 셔틀버스에 태워 등교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과정에서 나빠진 허리 건강이 속상한 것보다 아들이 이른 아침마다 마주해야 했을 셔틀버스와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그리고 영어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을지 마음이 아팠다.
아들이 자란 뒤 사과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다른 대안을 찾기도 불가능했거니와 부끄럽게도 나 자신에게 아이 마음을 돌아볼 성숙함이나 마음의 여유도 전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싫거니와 돌아갈 수도 없어 어떻게든 맞닥뜨리는 상황을 주위 도움을 요청하며 해결해가야 했던 시간은 앞으로 아들을 키우며 부딪혀 갈 진짜 세상을 하나씩 연습하며 강해져야 하는 고된 훈련의 시간이었다.
그것은 영어를 배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업료를 내고 한국인이 대부분인 ESL 코스에서 책으로 익히는 영어보다 학교, 경찰서, 병원, 은행 등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더 생생한 생활언어를 하나씩 습득해 갔다.
아들과 관련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겪으며 시간은 흘러 점차 생활에 적응해가며, 처음에는 감흥이 없던 하와이의 아름다운 자연과 세계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운영되는 독특한 프로그램들이 하나둘 눈에 보이고 관심 가기 시작했다.
지상의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니 하늘, 바다, 산, 나무 등 천혜의 자연은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아들은 반얀트리(Banyan Tree) 나무를 기어오르고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많은 별을 하늘 가장 밑자락에서 가까이 보는 등 대자연 속에서 커가고 있었고, 나 또한 위대한 자연이 주는 힐링을 조금씩 경험해가며 우울증 약을 복용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국제적 단체다 보니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학생과 간사(Staff)로 모여들었다. 처음 환영의 밤 행사 때 40여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마치 올림픽 개회식을 하듯 국기를 흔들고 입장하며 새 학기를 축하했던 놀라운 감동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경험치가 동남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엄마와는 달리 7살 아들이 생활에서 경험하기 시작한 세상은 작은 세계였다. 미국, 영국, 케냐, 일본, 인도, 사모아 등 여러 나라 아이들과 매일같이 뛰어놀며 편견 없이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허물없이 친구가 되어갔다.
출처 : uofnkona.edu
독특한 프로그램도 기존 경험과 가치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선교와 구제 등과 관련한 다양한 교육 과정을 훈련받고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아웃리치(Outreach)하며 봉사하기 위해 매 학기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학교를 위해 일하는 간사들은 월급을 전혀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숙식비 등 비용 일체를 내고 자비를 들여 봉사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누군가를 돕는 삶을 살고자 자신의 시간과 돈을 쓴다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이해 가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감동이 되었다. 한국에서 이런저런 송사를 겪으며 마음이 강퍅해지고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나로서는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서 많은 위로와 도전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가치관으로 아이를 키워야 할지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는 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