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증
토요일이지만 채용 건강 검진을 하러 병원에 다녀왔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서 입사 취소될 뻔했던 일이 떠오른다. 풍진 항체가 없어서 임신 기간 내내 마음 졸였던 일도 떠오른다. 걱정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마음 졸였던 순간들이 머릿 속에 영화처럼 쫘악 펼쳐진다. 나는 지금 너무 간절한가보다.
오랜만에 이력서를 쓴다. 자기소개서도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처음 취업을 시작할 때처럼 한참을 고민에 빠진다. 관련 경력으로 채워야 하는데 최근에 별로 한 일이 없다. 나는 분명히 애쓰고 살았는데 모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니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바쁘게 살아온 그 시간 속에서 대체 난 무엇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책상 위 보라색 파일을 꺼낸다. 결혼하고, 첫째를 임신하고 나서 갑자기 시작한 일들부터,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이것저것 배웠던 흔적들이 들어있는 파일이다. 하나의 과정을 마칠 때마다 그 흔적들을 파일에 넣어두었다. 첫째가 중학생이 되고서야 이 파일을 천천히 읽어볼 줄이야. 한 장,한 장...천천히 눈으로 살핀다. 손으로 그 종이들을 쓰다듬는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 열심히 산 것은 틀림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에게 정성스럽게 칭찬을 시작한다.
첫째를 임신하고는 갑자기 보육교사 공부를 시작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기 전에 교사 실습도 마쳤다. 둘째를 임신하고는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했다. 둘째의 출산 휴가 시작한 첫날부터 출산하기 이틀 전까지 사회복지사 실습도 감행했던 나였다. 사람들이 힘들게 왜 하냐고 그럴 때도 끝까지 해냈던 나였다. 그렇게 파일 속에 담겨진 나의 모습은 결코 게으름이 없었다. 열 개가 넘는 자격증과 스무개 남짓한 수료증, 회사 다닐 때 받은 표창장도 여러 개 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몇 년이 지나서 이제야 칭찬을 하고 있다니 나에게 너무도 미안해진다. 보라색 파일 속의 종이들을 모두 보고나니 자기소개서를 쓸 힘이 생겼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서 증빙 서류를 부탁해본다. 증빙 서류가 지금 안 되는 곳은 1365봉사 실적도 인쇄한다. 사진 파일을 열어서 아이들과 수업했던 사진도 찾아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경력단절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나에 대해서 쓴다. 꼭 일하러 가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서 정성스럽게 천천히 쓴다. 모든 서류를 메일로 전송하고 나니 손이 정신없이 떨린다. 천천히 여러 번 계속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가방 속에 보라색 파일을 넣는다.
오늘 면접을 본다. 서류를 통과했으니 화요일 오후에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집이지만 정장을 챙겨 입는다. 안 보인다고 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살펴본다. 2시 40분에 zoom을 켰다. 면접에 참석한 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은 다섯 명이나 된다. 면접관들이 미소를 띄고 있는데 질문을 할 때면 그 목소리가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자기소개부터 하고 나서 면접관들의 여러 질문에 대답을 하면 된다는 설명을 듣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모르는 질문을 받아도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해야지’
나도 얼굴에 미소를 장착했는데 몸은 풀리지 않고 빳빳하게 굳는다. 내 앞에 지금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나도 학부모니까 질문하는 면접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생각하면서 집중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책에 대한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마친 후에 면접이 끝났다. 면접 결과는 회의 후에 전화로 통보하겠다고 한다. 나는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카메라가 꺼질 때까지 면접은 끝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