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과 녹색의 작은 비닐에 감싸져 있는 달콤한 설탕과 뽀얀 가루의 프림과 갈색의 커피가루. 그리고 여기에 아주 잘 어울리는 뜨거운 물 반 잔쯤. 이 둘이 같이 껴앉으면서 회오리를 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뜨이고, 아직 입에 한 모금 머금지도 않았는데 따스한 기운과 함께 향긋한 내음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순간에 이미 내 심장은 두근대고 있다. 내 몸의 혈관 속으로 벌써 도파민이 파팍 터지면서 엔도르핀이 마구마구 샘솟는 것을 느낀다.
난 네가 너무 좋다. 믹스커피.
너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지경이다. 인정한다. 난 믹스커피, 그와 사랑에 빠진 지 아주 오래되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진 지는 20살부터라고 치면 햇수로 24년째구나. 참 지독히도 사랑했구나. 그러던 어느 날 난 그와 두 번의 이별할 위기에 처해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삶의 낙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그와의 생이별은 한 나는 상사병 걸린 사람처럼 웃음기라곤 없이 흔히 말하는 매가리가 없는 상태였다.
아침에 출근을 할 때 나는 간단하게라도 요기를 하는 편이다. 남편은 내가 힘을 내려고 아침을 먹는 줄 아는데 아니다. 난 빈속에 커피를 마시고 위경련이 있었던 적이 있어서 커피를 먹기 위해서 밥을 먹는 사람이다.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난 커피를 편안하게 마시기 위해 아침밥을 먹는다.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의 시간이 지난 후 적지 않은 나이로 다시 3교대 간호사로 야간근무를 시작한 지 4개월 정도 후 심장이 너무 두근대는 것을 느끼고 병원에 찾았다. 심실조기수축, 부정맥이란다. 술, 담배를 안 하는 나에게 의사는 커피까지 끊으란다. 나에게서 유일한 삶의 낙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부정맥 진단을 받을 때보다 그와의 이별에 난 더 슬퍼했다. 우리의 이별은 단 번에 이루어졌고 나의 일방적인 이별통보로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또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이제 마흔이 좀 넘은 나는 야간근로자 건강검진에서 공복혈당장애 판정을 받았다. 혈당을 관리하지 않으면 당뇨로 진행할 가능성이 10% 정도다. 이번에는 당과의 싸움이다. 바로 쌀밥에서 카무트밥으로 바꾸고 채소를 우적거리며 먹고, 순수한 당 섭취를 자제하면서 자연스럽게 믹스커피는 더욱더 멀리하게 되었다. 정말 아주 가끔씩 몰래몰래 입을 맞추던 그와의 만남은 이제 영영 끝인 건지 못내 입술에 침을 바르며 입맛만 다셨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가 없다. 어제 우연히 휴대전화의 구석에 나의 사랑을 다시 만날 것 같은 좋은 광고가 스쳤는데 나의 매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한테 딱 맞는 사랑을 찾은 것이다. 이름하여 믹스커피인데 스테비아가 들어간 것이다. 예전에 먹어보긴 했는데 지독히도 달아서 커다란 머그잔에 물을 많이 받아서 마셨었다. 그런데 이번에 디카페인도 나왔다는 것이다.
어쩜... 나한테 취향저격이다. 부정맥이 있는 나를 위한 디카페인에, 공복혈당장애를 가진 나에게 스테비아 커피란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 굳이 그렇게까지 커피를 마셔야 하나 물을 수 있다. 난 그렇게라도 그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정말 하루를 보내는데 잠깐의 휴식이자 위안이 되는 커피 한잔의 여유가 나에게는 너무 필요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혼밥, 혼술은 어색하지만 혼자 마시는 커피 한잔은 오롯이 혼자임을 즐기는 시간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화살표 하나를 꾹 눌러본다. 내일이나 모레쯤으로 약속이 생길 것 같다. 그쯤이면 택배 아저씨가 우리 집 앞에 살포시 나의 그를 데려올 테니까. 우린 금방 다시 만날 수 있다. 나는 벌써부터 설레는 그와의 만남을 준비하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렐 머그잔을 꺼내어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