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빠져들게 만드는 브랜드들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 살면 옷 입는 즐거움보다 고통이 앞설 때가 많다. 철마다 바뀌는 유행을 쫓다 보면 어느새 옷장은 '한 번 입고 손이 안 가는' 옷들로 가득 차기 일쑤다. 빈티지 숍 알바생 못지않은 안목이 생겼다고 자부하지만, 여전히 내 옷장은 시행착오의 역사다. 한때는 릭 오웬스나 유튜버 육식맨처럼 고민 없이 검은 옷만 입으면 편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화려한 디자인보다 그 이면의 '태도'를 가진 브랜드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108,000원 중 마진은 13,100원입니다.
최근 내 지갑을 연 건 '마더그라운드'라는 패션 브랜드였다. 처음 상세페이지를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제품마다 제작 원가, 유통 수수료, 마진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었다. 플랫폼 입점 대신 자사몰 운영을 택해 유통 비용을 덜어내고, 그 혜택을 소비자에게 돌려준다는 정공법.
누군가를 설득하고 메시지를 설계하는 기획자로서, 이 투명한 숫자들이 주는 신뢰감은 그 어떤 화려한 카피보다 강력했다. 홍대 매장에서 마주한 브랜드의 공기는 그들이 말하는 '합리적 가격'이 단순한 마케팅용 수사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획자의 진심은 결국 디테일에서 터져 나온다. 나는 그 디테일에 홀딱 넘어가 아낌없이 신발, 후드티, 애플워치 스트랩까지 꾸준히 소비 중이다.
'사람'과 '서사'가 담긴 에디토리얼
AI가 지배하기 시작한 세상에 나의 '느린 취향'은 아직 종이 매체에 머물러있다. 유니클로 매장에 갈 때마다 옷보다 먼저 챙기는 건 <LifeWear Magazine>이다. 세계 각지의 일꾼들이 자신의 옷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들의 일상이 옷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묻는 이 잡지를 정독하는 게 나의 루틴이다.
그리고 색을 쓰는 방식이 좋다. 튀지 않는데 지루하지 않고, 설명이 과하지 않는데 기억이 남는다. 결국 나는 그 매거진을 읽고 나면 “오늘은 뭘 사야지”가 아니라, “옷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를 배우게 된다.
비슷한 맥락으로 '하바구든(HAVAGOODIN)'의 에디토리얼을 탐독한다. 단순히 스타일링을 제안하는 게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의 '맥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옷 자체보다, 그 옷이 놓이는 문장과 장면이 먼저 온다. 어떤 옷은 예뻐도 내 삶에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런데 어떤 에디토리얼은 ‘자리가 생기게’ 만든다. 나는 그 차이가 결국 설명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룩북 맛집'
룩북 맛집 havehad다. "이 모델은 지금 미팅에 늦어서 뛰어가는 중인가?", "이 옷을 입고 이 공간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해브해드의 룩북을 보다 보면 어느새 나는 그 옷을 입고 있는 나의 하루를 상상하게 된다.
결국 좋은 브랜드란 소비자의 상상력이 들어설 자리를 비워두는 브랜드다. 룩북 하나로 사용자의 동선과 상황을 설계해내는 그들의 기획력에 감탄하며, 나는 오늘도 기꺼이 그들이 설계한 상상력의 값을 지불한다.
해브해드는 스테레오포닉사운드라는 음악, 커피 등을 소비하는 패션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해브해드가 옷으로 상상력을 판다면, 그들의 브랜드 SPS는 공간(커피와 음악)으로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버린다. 홍대 매장에 찾아갔을 때 그 힙함에 매료되어 한동안 SPS 인스타를 들락날락했다.
자발적으로 슬로우어답터가 되었지만 한 번 브랜드에 매료되면 평생갈 기세로 마음 속 장바구니에 넣어둔다. 그렇게 남는 브랜드들의 행보를 보는 것이 내 작은 취미이기도 하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느리게 소비한다'는 것은 결국 브랜드가 가진 철학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이다. 마진을 공개하는 투명함, 일상의 서사를 담아내는 성실함, 그리고 사용자의 상황을 배려하는 상상력. 내가 사랑하는 브랜드들은 모두 이 '한 끗'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오늘도 기꺼이 그들이 설계한 상상력의 값을 지불한다. 나 또한 누군가의 지갑을 기분 좋게 열게 만드는 '한 끗'을 기획하기 위해 애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