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노자로 일하기
호주는 정말 정말 일본은 물론 일본음식을 사랑한다. 길거리에 저렴한 초밥 테이크아웃 전문점부터 시작해 고급 일식 레스토랑까지 일식을 즐길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나는 그중 지어진 지 40년은 된, 역사가 꽤 있는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피스 중심가에 위치해 있는 유일한 일식 레스토랑인 데다, 그 근방에서 40년 넘게 터줏대감이었으니 단골도 무지하게 많았다.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진 단골들을 위해 세심하게 기억할 것들이 참 많았다. 단골손님 단 한 명만을 위한 메뉴도 많았고, 할인율도 달랐으며, 식사 스타일과 습관에 따라 센스 있게 일하면, 팁문화가 아닌 호주더라도 하루에 50불 넘는 팁(자그마치 450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호주 캐주얼잡 최저시급 26.73불)
물론 나도 처음부터 일을 잘했던 건 아니다. 민망한 실수도 정말 많이 했다. 초반엔 손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실수를 많이 하는게 나쁜 건 아니다. 기억에 남는 일화를 하나 말하자면, 단골 노부부 손님에게 국을 서빙하다가 식탁에 쏟았던 적이 있다. 다행히 손님 옷에 묻거나 다친 건 아니었고, 나는 죄송하다며 얼른 행주로 테이블을 치웠다. 하필이면 단골손님한테 실수를 했다는 사실에 일하는 내내 맘에 걸렸다. 그런데 마감할 때 사장님이 갑자기 나에게 20불을 주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노부부 손님이 내가 놀랐을까 봐 달래주고 싶어 팁을 전해달라 하셨던 거다. 돈을 떠나서 그 마음이 정말 고마운 순간이었다.
이렇듯 내가 일했던 식당은 손님들과의 접촉이 꽤 컸다. 이 곳은 코로나 이후 급증한 모바일 주문도, 우버 이츠(배달음식) 서비스도 없었을뿐더러, 매주 혹은 매달마다 오는 수 십 년 된 단골도 수두룩했다. 그렇다 보니 의사소통이 수월할수록 단골들이 주는 팁의 액수도 올라갔다. 게다가 홀직원은 나뿐이거나 나 포함 2명이었기 때문에 팁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일한 지 꽤 됐을 땐, 나만 가지라며 따로 나에게 팁을 주는 손님들도 더러 있었다.
A4용지에 글씨만 적힌 메뉴판을 고집하던 사장님 덕분에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특히 새로 온 손님들이나 일본어의 영어표현은 생소한 사람들이 많고, 알러지에 민감한 외국이니 어떤 재료로 어떻게 요리되는지, 글루텐 프리(밀가루 음식에 들어있는 글루텐 성분이 없는 음식)로 변경이 가능한지, 비건을 위한 요리는 있는지를 전.부 영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0다. 그리고 이 글씨만 딸랑 적힌 메뉴판은 앞서 말한 정보가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직원인 내가 설명해줘야 했다.
이렇게 스크립트를 만들어서 계속 계속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하는 공부를 했다. (7페이지나 된다) 별 거 아닌 쉬운 표현들이지만, 정말 바쁜 상황에서는 말문이 막히기 쉽다. 위 표현들을 툭 치면 나올 정도로 체득했다. 처음엔 부자연스럽던 표현들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으며(?) 계속 이 스크립트를 업데이트해 갔다. (이 정도면 팁 많이 받을만하지 않나요..?)
특히 실수했을 때 그냥 헤헤 웃으면서 무마하고 싶지 않았다. 실수를 하더라도 영어로 명확하게 사과하고 상황 설명을 하고 싶었다. 고작 레스토랑 직원이었을 뿐이지만, 돈을 버는 수단 이상의 것을 얻어 가고 싶었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
내가 일한 곳 뿐만 아니라 서비스업은 융통성이 정말 중요하다. 융통성은 영어를 잘하는 것과는 별개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손님에게 예스맨이 되어선 안되고, 그렇다고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큼 차갑게 대해서도 안된다. 항상 좋은 단골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도 사람인지라 꺼리는 단골이 몇 있었는데, 대부분은 5성급 호텔만큼의 고퀄리티 서비스를 원하는 (팁도 안 준다) 소위 왕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영리해야 한다. 열심히만 하면 아무도 모른다. 사장님한테 티를 좀 내줘야한다. '얘가 이러이렇게 해달라는데 안된다고 설명했는데도 자꾸 그래ㅠ' 라는 식으로 사장이 내 탓을 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선을 그어줘야 사장도 내 능력을 의심 안하고 시급도 잘 올려준다. 더욱이 이런 손님들은 정성을 다해도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당히 사무적으로 대해줘야 내 정신건강에도 좋다.
그리고 여기서 팁 하나 더 얘기하자면, 보통 캐주얼잡이더라도 한 곳에서의 경력이 쌓이면 사장 재량으로 시급을 올려주기도 하고, 직원이 올려달라고 요구도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일하는 곳이 2개월이 넘었는데도 시급이 오르지 않았다면 당당히 건의해봐도 좋다. 2-4개월에 한번씩 내 몸값을 올릴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2번 시급이 올랐다. 사장이 다행히 좋은 분이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때가 되면 올려주셨다. (큰 실수를 하지 않고 성실한 건 기본 조건임)
나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편(외국 나와보니 깨달음)이다.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하다보니, 간혹 손님들이 나를 자연스럽게 일본인으로 생각하곤 일본어로 말을 걸기도 했다. 그들은 악의없는 성의(?)라 생각할지라도, 한국인인 나는 기분이 썩 좋진 않은 건 사실. (심지어 사장도 일본인이 아닌데)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모든 동양인이 일본인일 거라는 생각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하지만 나를 일본인으로 보는 시선을 역으로 잘 이용할 수도 있다.
나는 서빙은 물론 계산과 음료 제조 등 올라운더(All-rounder, 주된 업무 외에도 다양한 일을 하는 포지션)였기 때문에, 계산할 때 손님들과 스몰토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참 많았다. 서비스에 만족한 손님들은 간혹 내 이름을 물어보기도 하는데, 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TMI로 나는 '한국'에서 왔어~ 를 콕 찝어 알려준다. 그러면 대게 손님들도 아 정말? 나 예전에 한국 갔었는데 너무 좋고 어쩌구~, 한국인 동료가 있었는데 좋은 친구였고 블라블라 로 응수해 준다. 뭐, 얼추 백인들 예쁨 받고 싶은 동양인 포지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잘했을 땐 내 nationality(국적)을 반.드.시 티 낸다는 거다. 대신 실수했을 땐 일본인이라 생각하게 냅둔다.ㅎ
하루는 한 손님이 '너는 한국인인데 왜 일식 레스토랑에서 일해?' 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나 원참, 일본인만 일식당에서 일해야 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돈 버는 데는 국경이 없어' 라고 대답해 줬다.
호주는 이민자가 많고 워홀의 허들이 가장 낮은 나라인만큼 워홀 인력들을 악이용 하는 사장도 많고, 빨리빨리의 민족인 한국 워홀러들끼리 텃세 부리는 곳도 있다. 제발 한인 식당, 특히 한인 사장이 일하는 곳은 피하도록 하자. 배고프다고 똥먹는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