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비 May 20. 2024

영어 자격증 없어도 된다_3

못해도 실전 영어

호주에서의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곳의 다 나같이(?) 열심히 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 다시금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누가 보면 미국에서 나고 자란 줄 알겠어요..) 그렇게 무계획으로 홧김에 베트남으로 훌쩍 떠났다. 그렇다. 난 지독한 자극 추구형 인간이다.

베트남의 여러 곳을 혼자 여행하다 마지막에 도착한 호찌민의 작은 호스텔에서 다양한 인종과 국적들의 사람들이 로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데도 베트남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러시아 친구, 전공자가 아님에도 영상 편집을 하며 여행 자금을 모으는 벨기에 친구, 경영 전공자가 아니지만 이곳에서 사업을 하는 미국 친구 등. 그리고 베트남을 배회하는 나.


맥주탑을 쌓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던 호찌민 호스텔

진리는 와인 속에 있다 (인 비노 베리타스, In vino veritas)는 술에 대한 예찬이 있다. 호주에서는 와인을 마시며, 베트남에서는 맥주를 마시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듣고, 낯을 가리는 나는 술기운을 빌려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며(liquid courage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실력을 늘렸다. 사실 술이 내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8할은 차지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호스텔에서 만난 이 미국인은 매일 내가 로비에 나타났다 하면 먼저 말을 걸었고, 이런저런 에피소드(불행 보존의 법칙 편 참고) 끝에 우린 정식으로(?) 사귀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이 미국인과의 동행. 나는 베트남 3개월 관광비자를 승인받았고, 이 미국인과 다낭, 호이안, 냐짱(나트랑), 호찌민, 하노이를 여행했다.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에서 난 영어만 쓰게 되는(?) 환경에 놓였다. 둘 다 베트남 안에서는 외국인이었기에 온갖 산전수전과 사기도 당하고, 박 터지게 싸우기도 하면서 나는 실전 영어를 머릿속에 박박 집어넣었다.


한이 서린 워킹데드

 

그렇게 외국생활의 지친 하루 끝을 달랠 수 있었던 건 함께 시리즈물 보기였다. 둘 다 좀비물을 좋아하는 덕에 킹덤, 지금 우리 학교는 등 한국 좀비 시리즈물을 섭렵했고, 대하드라마 급(무려 시즌만 11개)인 워킹데드까지 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 고역이었다. 매일 밤마다 이 영어 듣기(?)를 몇 시간씩 해야 했고, 미국인에겐 전혀 문제없을 '드라마 보기'가 나에게는 공부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다양한 악센트의 미국인이 다수 등장하는 데다가, 옆에서 중계를 해주는 미국인 덕분에 초초초초집중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시즌1에서는 한국어 자막이 없으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시즌이 거듭되면서 주인공들의 다양한 악센트에 익숙해지고, 자주 말하는 대화 패턴들을 익히고, 모르는 표현은 바로 옆 인간 영어사전한테 물어보고, 감상평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국어 자막이 영어 자막으로, 나중엔 자막 없이도 어느 정도 대화를 따라갈 수 있었다. (시즌 7쯤부터..) 때로는 대사를 성대모사하듯 따라 하기도 하고, 드라마 인물이나 배경에 대한 코멘트를 수다 떨듯 하면서 비로소 시리즈를 즐길 수 있었다.



 비록 영어의 첫걸음은 사교육 열정 가득인 전형적 한국맘인 우리 엄마로 시작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영어에 대한 큰 흥미와 필요를 못 느꼈다. 더욱이 영어를 배우더라도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법이나 단어, 문장 배열에 대해선 어느 정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더라도, 원어민과의 대화에는 굉장히 취약했다.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다는 것이 내 영어 잠재력을 깨우는데 엄청난 역할을 했고(내가 익숙한 컴포트존 벗어나기), 가장 중요한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의지도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친구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 영어를 못해서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욕심, 드라마에 더 몰입하고 싶은 욕심, 팁을 더 받고 싶은 욕심, 말싸움을 할 때 논리적으로 내가 이기고 싶은 욕심... 등 이런 사소한 욕심들이 영어 실력을 향상하게 한 요인이 됐다. 아이엘츠 자격증 따야지라는 목표보다 더 재밌는 목표잖아요? 물론 영어권 환경에 놓이더라도 본인의 노력이 없으면 실력이 자동으로 늘진 않을 것.

그렇게 나는 원어민과 모든 일상 대화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게 됐다. (Upper-Intermediate level) 그리고 나는 다시 영어권 국가인 캐나다로 떠나게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