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양분되었다. 흔히 말하는 '좋은 직업'과 -공공연하게 그렇게 부르지는 않지만- '그렇지 못한 직업'으로 나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좋음'과 '그렇지 못함'으로 나누는 기준이 사회에 대한 기여, 숙련, 직업윤리 등 일반적으로 그것을 나누는 기준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전문 임대업자의 부동산 임대 행위는 사회의 공리를 감소시키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그 직업을 수행하는데 아무런 숙련이 없어도 되며, 그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직업윤리도 없고 스스로를 규제하는 조직체마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임대업자'는 직업으로 인정받는 것을 넘어 추앙까지 받는 직업이다.
최초의 무노동 직업, 임대업자
귀족, 사대부, 지주 /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이름은 달랐지만 무노동 계급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저 중에서 어떤 것도 직업의 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귀족 계급, 사대부 계급, 지주 계급과 같이 이들은 계급 내지는 계층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을 뿐 직업이라고 불리지 못하였다. 물론 그들 스스로가 직업으로 불리기를 꺼려한 탓도 있겠지만(T. 베블런에 따르면 그들은 명칭에서부터 완전한 유한계급임을 나타내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직업으로 불릴만한 요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유한계급은 스스로를 '직업인'으로 부르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한다. 자신의 성공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 덕분임을 알리고 싶어서이다.
노동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회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못하는 '좋음'이 어떤 식으로든 일단 최고의 반열에 오르면 그것이 가진 특징이 '좋음의 기준'을 다시 세운다. 그 직업이 가진 유일한 특징은 -직업이라는 것의 본질과 굉장히 모순적이게도- '노동이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직업수행에서의 노동혐오는 MZ세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MZ세대가 직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제가요? 그걸요? 왜요?'의 '3요'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은 자신의 몫이 아닌 추가적인 노동을 하면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직업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인다. 노동 없는 수익이 좋음을 차지하면 수익 없는 노동은 나쁨의 지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기준이 속성을 다시 결정한다.
자신이 제공하는 노동 자체에 대한 혐오는 확장되어 노동 집약적 직업군에 대한 비하와 연결된다. 물론 특정 직업에 대한 비하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대상 직업군의 '부도덕한 상술', '개인적인 일탈 비중' 등 그 직업 자체의 속성 때문이 아니었던 반면, 현재는 단순 반복적이고 숙련을 요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 직업이라면 도덕성 등과는 전혀 상관없이 비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심지어 해당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의 능력이나 노력을 비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런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평가가 내려진다.
일요일에 쉬어도 괜찮아.
'내가 일요일에 마트에 갈 자유를 빼앗지 말라.', '마트에서 일하면서 일요일까지 쉬고 싶으면 다른 일을 찾으라.', '당신들만 일요일에 못 쉬는 것이 아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마트 노동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대구시 전체의 마트 의무휴업일을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전환한 후에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반응이다. 우리는 고작 일요일에 쉬고 싶다는 아주 작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아이들과 같이 주말을 보내고 싶다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찾기 위해 한겨울보다 더 추운 날 아스팔트 위에 올라야 했다. 방송용 차량 위에 서서 나에게 쏠린 천여 개의 시선을 보자니 울컥했다.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에 발언 도중 두 번이나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때 하지 못한 한 마디를 여기서 하고 싶다. '일요일에 쉬어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