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가 부러지는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사무치는 고통이 뼛속까지 스며들다 못해 뇌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의 냄새, 작은 소리, 지나가던 사람의 표정까지 모두 기억하지만 전경은 붕괴되었습니다. 그것이 누가 낸 소리인지, 무엇의 냄새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혹시나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습니다. 저는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 것인지', '완치될 수 있는 부상인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웃으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이 얄미웠습니다. '부러진 것이 당신 다리가 아니니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속으로는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의무를 부여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법에 복종하라.', '약자를 보호하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교육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니까 아무 의심도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법은 너에게 나쁜 것을 명령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법에 복종하거라.', '약자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란다. 그러니 너의 힘이 닿는 곳까지 약자를 보호하렴.'
하지만 다시 어른이 된 우리는 사회에 나와 혼란을 겪게 됩니다. '법이 약자를 괴롭히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약자가 법을 어기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런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만 쉽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람도 법을 어기면서까지 돕지 못하고,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도 적법이라는 누더기를 쓰고 약자를 괴롭히는데 앞장서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마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고 의사에게 매달린 저처럼, 저에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호소하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나는 그냥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회사가 법을 업고 나의 권리를 침해하면 '내 아픔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이냐고'.
하지만 사랑하는 노동자 여러분,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말은 제가 여러분의 아픔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회사가 좋은 조건으로 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부추겨도, 노노 갈등 사이에 저를 음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아무런 슬픔도 노여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길을 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대들도 그대들의 길을 묵묵히 가면 됩니다. 그대들이 가는 그 길 앞에 가시밭이 있으면 제가 먼저 밟아 굳어진 피로라도 평평하게 만들겠습니다.
저는 오늘 한 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몇 번 읽어야 내용이 파악될 정도로 긴 글이었지만 지금 제 머리엔 단 한 줄만 남아있습니다. '져도 상관없으니 회사를 혼내주세요.' 이 한 줄 때문에 저는 패소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이겨서 1원까지 받아내어 회사를 혼내주겠습니다. 그리고 노동이 우습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저는 상여금의 통상임금 산정이 '강철로 된 무지개'임을 압니다. 그러니 오늘 밤도 그 기계 옆에서 일해도 된다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대들에게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