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3층 난간 위에서

나를 살린 건, 사람이 아니었다.

by 진우

그날, 우리가 왜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우리 부부의 싸움은 늘 그랬다.

시작은 먼지처럼 사소했으나, 끝은 언제나 서로의 영혼을 난도질하는 전쟁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상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비난은 날카로웠고, 방어는 거칠었다.

내 눈앞에 있는 건 아내가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지우고 싶었던 나의 과거였다.


나는 아버지를 닮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격해진 감정 속 나의 모습은 어느새 그토록 증오하던 그 남자를 닮아 있었다.

나는 그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나도 힘들어. 미치겠다고! 차라리 내가 죽어버릴게. 살기 싫어!"


"쾅"


내 절규에 아내는 안방 문을 닫아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닫힌 방문이 거대한 벽처럼, 혹은 관 뚜껑처럼 느껴졌다.


나는 홀린 듯 거실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훅, 하고 얼굴을 스치는 밤바람. 23층의 공기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나는 방충망을 열고 난간 위로 발을 올렸다.

하늘에는 베일 듯 날카로운 초승달이 떠 있었고, 아래는 까마득한 어둠뿐이었다.


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지면, 이 지긋지긋한 패배감도, 뼛속 깊이 박힌 상처도,

지독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도 모두 끝날 것 같았다.


'그래, 끝내자. 지금보단 나을 거야.'


상체를 난간 밖으로 내밀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설이었다.


이미 한 번 버려졌던, 상처 많은 1살짜리 유기견.

녀석은 짖지도 않고, 다가오지도 못한 채,

거실 한복판에 얼어붙어 있었다.


설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형'이 자신을 두고 영영 떠나려 한다는 것을.


'낑, 낑...'


녀석이 낼 수 있는 소리는 그게 다였다.

그 작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형... 형도 나 버릴 거야?'


숨이 턱 막혔다.


다시 태어나도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평생 지켜주겠다고 맹세해 놓고.

나는 지금 이 작은 생명에게 두 번째 유기를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배신자가 되어.


나는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거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미안해... 미안해, 설이야."


나는 녀석을 와락 끌어안았고, 설이는 내 눈물을 핥아주었다.

설이의 체온은 따뜻했다.

23층의 차가운 바깥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온기가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당겼다.


입버릇처럼

"너 죽으면 장례식 다 치러 주고, 내가 3일 뒤에 따라갈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라고 했던 아내와의 약속도 그제야 떠올랐다.


나는 참으로 이기적이고 비겁한 인간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안방에서는 아내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거실에는 여전히 불안한 설이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했고,

살고 싶지 않았지만 살아남았다.


길고도 비참한 밤이었다.


하지만 그 밤의 끝에서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내 안의 불행은 23층에서 뛰어내린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내 유년 시절,

그 잿더미 속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진짜 아빠가 되기 위해서.


나는 이제껏 도망쳐왔던 그 기억과 마주해야만 한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