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바지에 꽂힌 식칼
화재 후 마을 빈집을 전전하던 5년.
그 지긋지긋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던 날, 아빠는 의기양양하게 내 손을 이끌었다.
"진우야, 이게 우리 집이다."
아빠가 직접 지은 조립식 패널 집. 번듯한 아파트는 아니었지만, 내 눈에는 궁전 같았다. 난생처음 생긴 실내 화장실, 그리고 나만의 방. 하지만 지붕 패널에 커다랗게 적힌 붉은 글씨를 보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 내. 세. 장. 차>
원래는 '내수세차장'이었다. 폐업한 세차장에서 버려진 패널을 주워와 조립하다 보니, 글자 순서가 뒤죽박죽 섞여버린 것이다. 가난이 만든 우스꽝스러운 문패. 하지만 아빠는 그마저도 자랑스러워했다.
"진우야, 네 방은 아빠가 특별히 신경 썼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할 거다."
"이 집에서 제일 좋은 방이다."
그날 밤, 나와 동생은 아빠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사치기 사치기 사빠뽀~"
아빠는 정체불명의 노래를 불렀고, 우리는 낄낄거리며 따라 불렀다.
엉터리 간판 아래, 우리 넷은 완벽한 가족이었다. 나는 정말로 이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아빠가 지은 그 '제일 좋은 방'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 패널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실 겸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나 적나라했다. 그러다 밥상 위에 초록색 소주병이 쌓이기 시작하기라도 하면, 그 좁은 주방은 순식간에 공포의 밀실로 돌변했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낮에도 아빠의 기분이 틀어지면 소주병은 밥상 위로 올라왔다.
얇은 벽 너머 '딸깍'하고 소주 뚜껑 따는 소리가 들리면 내 심장은 요동쳤다.
이어지는 아빠의 한숨,
거친 혼잣말,
그리고 엄마를 향한 날 선 시비가 라이브 방송처럼 내 방으로 흘러들어왔다.
뒤섞인 간판 글자처럼, 우리 집의 평화는 아주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뒤집히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그날이 왔다. 외할머니가 오신 날이었다. 오랜만에 북적여야 할 집안 공기는 시작부터 살얼음판이었다. 아빠는 여느 때처럼 밥상을 차지하고 앉아 취해 있었고, 엄마와의 말다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여편네가 돈을 어디다 쓰는 거야!"
아빠의 고함이 터졌다. 얇은 패널 벽이 징처럼 울렸다. 엄마는 지지 않고 맞섰다. 고성이 오가고 밥상이 들썩였다. 잔뜩 겁에 질린 외할머니가 엄마의 손을 끌며 말했다.
"나가자. 일단 피하자."
할머니와 엄마가 도망치듯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주방에 앉아있던 아빠의 눈빛이 달라졌다. 초점 잃은 눈동자에 살기가 돌았다. '드르륵'. 싱크대 서랍이 열리는 소리. 달그락.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 손에 들려 나온 것은 검정 손잡이의 은색 식칼이었다.
"이 쌍년들, 다 죽여버릴 거야."
아빠는 중얼거리며 서슬 퍼런 칼날을 자신의 엉덩이 쪽으로 가져갔다. 늘어난 흰색 메리야스, 무릎 옆에 주머니가 달린 낡은 회색 반바지. 그 헐렁한 고무줄 바지 뒷단에 식칼을 푹 찔러 넣었다.
무거운 칼자루 무게에 바지 고무줄이 엉덩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칼날의 감촉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익숙하고 무심한 동작이었다.
질질 끌리는 슬리퍼 소리가 현관을 향했다.
'철컥'
아빠가 나갔다. 나는 문틈으로 그 뒷모습을 보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초라한 차림새 허리춤에, 삐죽 솟은 은색 식칼 한 자루. 그 기괴한 모습은 사진처럼 내 눈에 선명히 박혔다.
당장 뛰쳐나가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얇은 장판에 들러붙은 얼룩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망치듯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고 기도했다.
'제발... 제발...'
그리고, 필름이 끊겼다.
그날 아빠가 밖에서 엄마에게 칼을 휘둘렀는지, 동네가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뇌는 그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강제로 전원을 내려버렸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할머니는 그날 밤 일을 평생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는 사실뿐이다.
눈을 떴을 때, 창밖은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목이 타들어 갔다.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주방으로 나갔다. 밥상 옆,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아빠였다.
어젯밤의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세상모르고 코를 골고 있었다. 반바지 뒤춤에 꽂혀 있던 칼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엔 구겨진 소주 페트병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싱크대를 확인했다. 물기 없는 개수대 바닥, 어젯밤의 그 식칼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시며 잠든 아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허무했다.
어젯밤 식칼을 허리춤에 꽂고 짐승처럼 날뛰던 그 괴물이, 지금 내 발밑에서 웅크리고 잠든 저 초라한 남자라니.
깨달았다.
아빠가 주워 온 패널 벽은 바깥의 칼바람은 막아냈지만, 집 안에서 불어닥치는 광풍 앞에서는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어린 내가 바랐던 것은 대단한 구원이 아니었다.
그저 내일도 소주병 없는 무사하고 평온한 일상, 그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