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아버지와 농사일을 하면서, 이따금씩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평소에는 말이 없는 아버지도 밭에만 가면 의외로 많은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특히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버지는 5살 때 천자문을 뗄 정도로 매우 똑똑했다고 한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지만, 아버지가 다니던 시절엔 국민학교였던 그곳에서부터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꿈은 판사나 선생님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집에 찾아와 아버지를 꼭 고등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할아버지를 설득할 정도로 공부에 뛰어나셨다고 한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어린 나이에도 집안을 돕기 위해 다른 집의 일을 나가셨다. 그때 나이가 고작 열여섯이었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만약 내가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했을까?’ 나 역시 열여섯을 지나왔지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아버지 역시 자신만의 꿈과 하고 싶은 일이 많으셨을 텐데, 그 시절 농사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현실이 나는 안타깝다.
지금도 아버지는 가끔 농담처럼 말씀하신다.
“그때 공부만 계속했으면 적어도 선생님은 되었을 텐데.”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끄덕인다. 아버지의 성품이라면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었을 것이다. 따뜻하고 성실하고, 누구보다 성품이 곧고 바른 분이시다. 정말 잘 어울리는 꿈이었다.
재미있는 건, 우리 아버지가 원래는 잠이 굉장히 많으시다는 점이다. 겨울만 되면 늦은 아침까지 잠을 주무신다. 하지만 농사철이 오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신다. 인내, 노력, 꾸준함, 성실함 같은 힘들이 마치 슈퍼맨처럼 아버지에게 나타난다. 해가 뜨기 전부터 밭으로 나가, 해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신다. 그 모습을 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학교 숙제로 존경하는 사람을 적어오라는 과제가 있었던 적이 있다. 보통 아이들은 위인이나 유명한 인물을 적었겠지만,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를 적었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얼마나 존경스러운 분인지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나는 누군가가 묻는다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우리 아버지를 꼽는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나는 남자 주인공 양관식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자식에게는 한없이 자상하고 다정한 모습이, 정말 우리 아버지 같았다.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해 보여도, 누구보다 깊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아버지가 바로 그런 분이다.
아버지와 함께한 그 수많은 밭일들, 두둑을 만들고, 모종을 심고, 땡볕 아래에서 흙을 뒤집던 그 시간들은,
내 삶의 가장 단단한 토대가 되었다.
아버지의 밭에서 내가 배운 건 농사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 밭에서 인내와 성실함을 배웠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들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이제 나도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의 밭에서 배운 것들은, 내 삶의 소중한 뿌리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 아이에게도,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삶의 방식을 천천히 물려주고 싶다.
흙에서 배운 따뜻함을, 세대 너머로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