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탄생 01

001

by DAR LIM

“구천구백구십구 번째 신이 소멸하였습니다.”

“아니, 또요?”

“거, 그래도 오백 년은 버티지 않았소. 꽤 버틴 게지.”

“장난합니까? 천 년은 거뜬할 거라 여겨 뽑은 신이 아니었습니까!”


커다란 원형 테이블 주변으로 모인 이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뱉었다. 빛이 나는 하얀 두건을 뒤집어쓴 그들은 공교롭게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몸은 고사하고 손조차 안 보였다. 실제 두건 너머 얼굴이 있는지조차 희미했다.


그들은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몸을 뒤척이거나 하다못해 두건 자락이 펄럭거리지도 않았다. 너무도 고요했다. 동시에 생명의 역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또 다르게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처럼 허무할 뿐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곳에 쏠려 있었다. 무저갱 같은 두건 안에 시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말이다.


원형 테이블은 우주의 모든 반짝임을 모아놓은 듯 영롱했다. 까맣지도, 푸르지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깔은 어떤 언어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촘촘히 박힌 무수한 빛들은 크기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고 미세했으나 전체를 아우른다면 상당히 거대했다. 그것은 산골짜기에 흐르는 강물 같았으며 거친 바위를 뚫을 힘찬 폭포였고, 대하를 누비는 바다를 닮았다.


중앙에는 천천히 돌아가는 푸른 구체가 있었다. 영롱한 푸른 빛은 신성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주를 감싸거나 혹은 우주를 품은 구체는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구체 주번으로 은은한 안개가 고였는데, 두건 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매우 흡사했다. 얼음만큼 차갑지는 않으나 온기가 느껴지지도 않는 연기는 불안하면서도 차분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했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신을 뽑아야 하오.”


하얀 두건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모를 만큼 두건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시끄러움과 소란은 다른 곳에서 들렸다.


“하…… 이번에는 어떤 제물이 올라왔습니까?”

“요즘은 완전무결하게 맑은 영혼이 좀처럼 드물…….”

“아니, 그럼! 제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오?”

“제물이 없다니? 세계가 붕괴합니다!”


하얀 두건들은 언쟁을 높이며 서로 제물을 내놓으라 소리쳤다. 소란은 부지불식간에 번져 어느새 싸움이 되었지만 주변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영롱하게 돌아가는 푸른 구체와 잔잔한 안개, 피안의 연기는 처음과 같았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과열되었을 때 새로운 신을 뽑아야 한다고 했던 하얀 두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완전히 새로운 제물을 찾았소.”

“어허, 그럼 처음부터 떡! 하니 내놓았으면 될 걸, 왜 이제야 말씀 하오?”

“그 영혼은 완전무결하오?”

“물론이요. 너무도 순수하고 더없이 깨끗하며 한없이 고결하여 완전무결하지. 단 맑지는 않소. 어둠, 그 자체지. 그보다 컴컴하고 깊은 암흑은 없을 거요.”


잠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정적은 제법 오래 이어졌다.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색을 잘 입힌 유화 한 점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과 같았다. 사소한 움직임, 미세한 소리조차 없었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을 유추할 수조차 없을 만큼의 기나긴 침묵 후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안 되오.”

“어째서요?”

“‘완전무결하게 맑은 영혼’만이 제물에 오를 자격이 있소. 하물며 어둠이라니!”

“세상이 바뀌었소. 그만큼 세계 또한 바뀌어야 하지. 이제 더는 완전무결하게 맑은 영혼은 존재하지 않소. 사실 옛날 옛적에 사라졌지.어째서 신들의 소임 기간이 점점 짧아진다고 생각하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초대 신은 무려 삼천 년 이상을 존재했으나 언젠가부터 소명을 오래 견디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천 년, 천 년, 그러다 오백 년. 이는 세계의 존위를 위협하는 문제였다. 하얀 두건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세계는 붕괴한다. 그럼 모든 게 끝난다. 카오스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도 어둠은 안 되오.”

“아니, 어둠이야말로 신세계를 이끌 완벽한 존재일지도 모르오. 그는 선이 없어. 오로지 악만 있지. 그렇기에 적임자라는 것이오.”

“동의할 수 없소.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생각해 보시오. 최근 제물들은 죄 어중간 했소. 완벽하게 선하지도, 완벽하게 악하지도 못했지. 어중간 했기에 소명을 견디지 못해 금세 소멸해 버리는 것이오.”

“그렇다고 완연한 악을 세우자는 말이오? 무법천지가 될 거요. 인류와 생명이 멸종하고 나아가 세계가 무너질 것이 뻔하오.”


모두가 반대했으나 의견을 낸 하얀 두건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완전무결하게 맑은 영혼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었으니 나는 마지막으로 어둠에 걸어보고 싶소. 만약 다른 방도가 있다면 내 순순히 따르리라.”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 수 없었다. 다른 방도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의견을 낸 하얀 두건도 누군가 새로운 제물을 입에 올렸다면 어둠을 내세우지는 않았으리라. 마지막이라는 말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고 그 사실을 모르는 하얀 두건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길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그럼 다들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일 년을 주지.”

“무엇을?”

“일 년 동안 신으로 올려 주지. 단 소명은 똑같이 치르되 영생을 주지는 않겠네. 우리는 일 년 동안 완전무결하게 맑은 영혼을 찾을 것이야. 만일 어둠이 세상을 뒤집어 버리려는 시도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 즉시 먹어 치워 버리겠네.”

“일 년이 지나면?”

“일 년 후에도 적합한 제물이 나오지 않을 경우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택하겠네. 어둠이 얌전할 경우 영생을 주지. 반대라면 그를 먹어 치운 후 불완전하더라도 선한 영혼을 제물로 삼을 걸세. 그 끝이 결국 세계의 파멸이라 할 지라도.”

“동의하네.”

“나도 동의하겠네.”


심사숙고 끝에 나온 타협에 너도나도 동의를 외쳤다. 의견을 낸 하얀 두건은 잠시 침묵하더니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네! 그렇게 함세!”


그 순간 하얀 두건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양팔을 번쩍 들었다. 실상은 긴소매 부분이 위로 쭉 뻗은 모양새일 뿐 실제로 팔을 뻗은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만세를 한 것 같은 모양새일 뿐이었다. 동시에 거센 바람이 불었으나 펄럭거리는 두건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여전히 사소한 움직임 하나 없었다. 일어선 두건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선이 안 된다면 악으로 다스리리라! 악이 선이 될지 어니! 만 번째 빛이 되리라!”


그 순간 천천히 돌아가던 푸른 구체가 거세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점점 회전 속도를 올리던 구체는 바람이 거세짐에 따라 안개에 휩싸였다. 안개는 점점 커졌고 곧 강렬한 빛이 폭발하듯 일어나며 모든 걸 가렸다. 빛 속의 적막이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