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의 산물
글을 쓰는 건 질색이다.
오른손으로 연필을 들고, 왼손으로 종이를 잡고,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나는 버겁기만 하다.
세익스피어니, 찰스 디킨스라든지, 그런 유별난 사람들처럼 나도 글을 쓰는 데에 위대한 목적이 필요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만, 정작 명제는 허공 속에서 미끄러진다.
글을 쓰는 행위에 마땅한 이유가 왜 필요한가. 이유는 늘 사후에 만들어진다. 나는 그 사실이 싫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글이 나를 쓴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글을 쓰는 건 질색인데, 이 온라인 공간에서 자발적으로 문장을 남기고 있다.
어쩌면 나에게 글쓰기는 하나의 ‘기행’ 일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은 인간을 ‘이유를 찾는 동물’이라 불렀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은 ‘의미를 상실한 동물’ 인지도 모른다.
의미를 잃었기에, 우리는 다시 그 의미를 붙잡으려 발버둥치는 것이다.
이 글 또한 그 발버둥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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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속은 더부룩하고, 할 일은 태산이고, 성적은 달라진 게 없고, 설상가상으로 수업은 줄리고, 심지어는 월마다 불쑥 찾아오는 적색의 불청객도 왔다.(월경 말이다) 평소엔 머리를 식히려 하던 의미 없는 행동들조차 머리를 헤집는 꼴이 되었다.
이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내가 찾는 건 ‘멈춤’이다. 그러나 멈춤조차 쉽지 않다.
사르트르라면 말했을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고.
망각마저도 우리가 택한 자유의 일부라면, 나는 지금 그 자유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이 글쓰기란, 망각에 저항하려는 미약한 몸짓일까,
아니면 망각을 더욱 깊게 파내려가는 자가굴착일까.
피곤하다. 하지만 피곤함은 때로 존재의 증거다.
지쳐 있다는 건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피로감이 나를 다시 쓰게 한다.
저 네 글자에 담긴 의미가 2분 전의 나에겐 얼마나 클지는 모르겠지만,
2025년 9월 14일 12시 1분의 나는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
그리고 12시 3분의 나는, 그 사실을 되새김질하듯 다시 기록한다.
글쓰기는 살아 있음의 반복 확인이다.
원동력.
그건 거창한 신념이나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 단지 ‘지금 이 순간을 버티게 하는 미세한 진동’ 이지 않을까?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흐릿해도, 어딘가에서 ‘아직 써야 한다’는, ‘아직 존재해야 한다’는 미세한 압력이 나를 첨예하게 밀어붙인다.
그 압력은 체념의 산물이며 동시에 생의 증거다.
원動力.
動은 움직임이고, 力은 힘이다.
그런데 어쩌면 움직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멈추지 않음’ 일지 모른다.
삶은 나아감이 아니라, 멈춤의 연속을 견디는 일이다.
2025년 9월 14일 12시 15분의 내 원동력은, 그저 ‘멈추지 않음’ 그 자체인가 보다.
-2025.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