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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May 12.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산책의 간격_ 피터팬 컴플렉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봤어요. 하루키 원작이어서, 당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하루키라서요. 영화는 처음쓸쓸하고 조용하게 미끄러지는  같았는데 깜빡이는 신호등 앞에 서 있다 시동이 꺼지기 일쑤였어요. 그러다 부릉부릉 소리도 없이 급발진을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 있었죠.


중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는 차에 타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게 운전하는 영화 속 그녀는, 중학생일 때 운전을 시작해요. 멀리로 출퇴근하는 엄마가 차에서 잘 수 있게요. 미숙한 운전 탓에 자다  엄마 그녀를 때리며 심하게 화를 내곤 했기 때문에 그녀는 세상에서 운전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전 운전을 못 해서 어느 도시에서나 걷는 사람이 됐어요. 어 땐 하루를 온통 걷는 데 쓰기도 하죠. 저를 뺀 사람들은 모두 운전을 잘하니까 만나면 대부분 저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겠다고 해요. 진심과 예의상 한 말을 하기 힘들어서 언젠가부터 차와 관련된 모든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어요. 그 거절의 이유에 운전 못하는 사람을 향한 은근한 멸시, 귀찮아하는 표정과 역정을 지켜본 경험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죠.


어떤 사람들은 옆에 어린 사람이 있으면 투명 간이 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해요. 말을 걸 때만 살아있는 존재고 말을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인 것처럼요. 타인을 향한 분노를 어린이가 있는 공간에 넌지시 뿜고 나서, 아무도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죠.

없는 존재가 되어 들은 어른들의 혼잣말은 지금까지 어 숨어 있었을까요. 어떤 동화책과 만화도 가르쳐주지 않은 생의 비밀 같은 게, 그때 제가 보고 들은 세상 속에 있었는지도 몰라요.


난 차에서 기다리는 게 제일 싫어.

그 사람은 왜 차가(면허) 없어?


그런 말들. 어쩔 수 없이 태워주지만, 화난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표들. 그런 표현을 하고 나서, 태울 사람이 문 앞에 나타나면 반가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보며 둘 중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한 게 꼭 좋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즈음이에요. 솔직한 성격이라, 솔직함을 차마 숨기지 못해 누군가의 마음을 할퀴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운이 좋았던 건 인정해요. 저한텐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함께 어딘가로 가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저는 더 빨리 운전을 하게 됐을까요.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을까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황인찬 시인의 오디오 클립을 듣는데, 마음 아픈 부분이 있었어요. 시인이 이렇게 말한 부분이요.


운전을 해야겠단 생각이 든 건, 가족 중에 아버지만 운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말을 하고 나시인은, 대중교통을 제외 어떤 차를 타든 차 안에서 늘 있는 힘을 다해 긴장하고 있는 두려운 마음에 대해 얘기해요. 가족이 운전하는 차를 타도 그렇대요. 그렇게 운전이 싫고 두려운 사람이, 운전할 마음을 먹게 되는 건 결국 다른 사람 때문이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태워줘야 하기 때문에, 내가 타는 사람이 되는 게 미안하기 때문에.


그 말이 아팠던 건 저도 그런 이유로 운전을 시작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저를 위해서는 운전의 필요가 도통 생겨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태워주려면 운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거든요. 물론 그런 느슨한 이유로 시작한 운전이 쉽게 늘 리 없었고, 직장도 걸어서 십 분 거리라 운전할 일이 여간해선 생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차를 고 있어요.


운전을 못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너무 드무니까요. 나 운전 못 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 없으니까요. 운전을 하면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얘기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운전을 못 하면 생기는 나쁜 일을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고요. 감성에 호소하면 약한 인간인 걸 알아서, 감성을 건드 사람도 있었어요.


  한밤중에 고속도로를 달. 그러다 아무 휴게소나 들어가. 거기서 어묵을 사 먹고 국물을 훌훌 마시고 나서 다시 시동을 걸면, 쭉 펼쳐진 검은 도로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흘러.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 ... 세상에 아무도 없고, 차와 나만 남은 기분.


그 기분은 몰라도 라디오와 나만 남은 기분, 책과 나, 영화만 남은 기분은 아니까 그 말에 혹하긴 했어요. 정말 혼자 야간 운전을 하면 그런 밤이 펼쳐지는 걸까요, 그렇게 은밀하게 역동적이고 쓸쓸하게 활기찬 밤이.


운전을 못하는 작가들을 알아요. 왜 유독 어떤 직업군 운전 숙련도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제가 한 추론은 이거예요. 그들은 뭐든지 선명하고 크고 강하게 받아들여요. 대부분 느끼지 못하는 속도의 변화도, 옆을 스치는 자동차의 아슬아슬함도, 지나가는 사람의 무심한 걸음이 곧 다다를 위치도, 그들이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분명하죠.


저는 저 대신 운전을 해줄 사람이 아니라 왜 운전해? 라고 묻지 않을 사람을 찾아요.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에 없고 누구나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 박준 시인 말처럼, 누구나 견딜 수 있는 자기만의 속도가 있어요.

이렇게 슬픈데 어떻게 눈물을 안 흘려? 왜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울어? 그런 질문은 태어날 필요가 없는 질문이죠. 왜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가질 못해? 왜 비행기를, 배를 못 타? 라고 묻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기다렸지만, 아직 만나못했어요.


그걸 못하는 사람에겐 그만의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두려움일 수도, 너무 일찍 깨친 인간의 본성일 수도, 무기력이나 슬픔일 수도, 모든 걸 남들보다 몇 배 크게 느끼는 감각일 수도 있어요.


차도 있고 짧은 거리는 곧잘 운전해요. 그러니까 저한테 왜 혼자 멀리 못 가? 라고 묻지 말아 주세요. 이유는 여기 썼으니까요.


어깨가 살짝 닿을 만큼 떨어져서 걸어요, 차가 없는 시절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것처럼 차가 가득한 세계로 와요. 구멍을 빠져나오면 다른 차원 도착해 있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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