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 마이 카
<산책의 간격_ 피터팬 컴플렉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봤어요. 하루키 원작이어서, 당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하루키라서요. 영화는 처음엔 쓸쓸하고 조용하게 미끄러지는 것 같았는데 깜빡이는 신호등 앞에 서 있다 시동이 꺼지기 일쑤였어요. 그러다 부릉부릉 소리도 없이 급발진을 해서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죠.
중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는 차에 타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게 운전하는 영화 속 그녀는, 중학생일 때 운전을 시작해요. 멀리로 출퇴근하는 엄마가 차에서 잘 수 있게요. 미숙한 운전 탓에 자다 깬 엄마가 그녀를 때리며 심하게 화를 내곤 했기 때문에 그녀는 세상에서 운전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전 운전을 못 해서 어느 도시에서나 걷는 사람이 됐어요. 어떨 땐 하루를 온통 걷는 데 쓰기도 하죠. 저를 뺀 사람들은 모두 운전을 잘하니까 만나면 대부분 저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겠다고 해요. 진심과 예의상 한 말을 구별하기 힘들어서 언젠가부터 차와 관련된 모든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어요. 그 거절의 이유에 운전 못하는 사람을 향한 은근한 멸시, 귀찮아하는 표정과 역정을 지켜본 경험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죠.
어떤 사람들은 옆에 어린 사람이 있으면 투명 인간이 곁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해요. 말을 걸 때만 살아있는 존재고 말을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인 것처럼요. 타인을 향한 분노를 어린이가 있는 공간에 넌지시 뿜고 나서, 아무도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죠.
없는 존재가 되어 들은 어른들의 혼잣말은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을까요. 어떤 동화책과 만화도 가르쳐주지 않은 생의 비밀 같은 게, 그때 제가 보고 들은 세상 속에 있었는지도 몰라요.
난 차에서 기다리는 게 제일 싫어.
그 사람은 왜 차가(면허가) 없어?
그런 말들. 어쩔 수 없이 태워는 주지만, 화난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표정들. 그런 표현을 하고 나서, 태울 사람이 문 앞에 나타나면 반가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보며 둘 중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한 게 꼭 좋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즈음이에요. 솔직한 성격이라, 솔직함을 차마 숨기지 못해 누군가의 마음을 할퀴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요.
운이 좋았던 건 인정해요. 저한텐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함께 어딘가로 가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저는 더 빨리 운전을 하게 됐을까요.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을까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황인찬 시인의 오디오 클립을 듣는데, 마음 아픈 부분이 있었어요. 시인이 이렇게 말한 부분이요.
운전을 해야겠단 생각이 든 건, 가족 중에 아버지만 운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말을 하고 나서 시인은, 대중교통을 제외한 어떤 차를 타든 차 안에서 늘 있는 힘을 다해 긴장하고 있는 두려운 마음에 대해 얘기해요. 가족이 운전하는 차를 타도 그렇대요. 그렇게 운전이 싫고 두려운 사람이, 운전할 마음을 먹게 되는 건 결국 다른 사람 때문이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태워줘야 하기 때문에, 내가 타는 사람이 되는 게 미안하기 때문에.
그 말이 아팠던 건 저도 그런 이유로 운전을 시작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저를 위해서는 운전의 필요가 도통 생겨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태워주려면 운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거든요. 물론 그런 느슨한 이유로 시작한 운전이 쉽게 늘 리 없었고, 직장도 걸어서 십 분 거리라 운전할 일이 여간해선 생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차를 갖고 있어요.
운전을 못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너무 드무니까요. 나 운전 못 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 없으니까요. 운전을 하면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얘기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운전을 못 하면 생기는 나쁜 일을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고요. 감성에 호소하면 약한 인간인 걸 알아서, 감성을 건드린 사람도 있었어요.
한밤중에 고속도로를 달려. 그러다 아무 휴게소나 들어가. 거기서 어묵을 사 먹고 국물을 훌훌 마시고 나서 다시 시동을 걸면, 쭉 펼쳐진 검은 도로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흘러.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 ... 세상에 아무도 없고, 차와 나만 남은 기분.
그 기분은 몰라도 라디오와 나만 남은 기분, 책과 나만, 나와 영화만 남은 기분은 아니까 그 말에 혹하긴 했어요. 정말 혼자 야간 운전을 하면 그런 밤이 펼쳐지는 걸까요, 그렇게 은밀하게 역동적이고 쓸쓸하게 활기찬 밤이.
운전을 못하는 작가들을 알아요. 왜 유독 어떤 직업군은 운전 숙련도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제가 한 추론은 이거예요. 그들은 뭐든지 선명하고 크고 강하게 받아들여요. 대부분은 느끼지 못하는 속도의 변화도, 옆을 스치는 자동차의 아슬아슬함도, 지나가는 사람의 무심한 걸음이 곧 다다를 위치도, 그들이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분명하죠.
저는 저 대신 운전을 해줄 사람이 아니라 왜 운전을 못 해? 라고 묻지 않을 사람을 찾아요.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에 우열은 없고 누구나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던 박준 시인 말처럼, 누구나 견딜 수 있는 자기만의 속도가 있어요.
이렇게 슬픈데 어떻게 눈물을 안 흘려? 왜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울어? 그런 질문은 태어날 필요가 없는 질문이죠. 왜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가질 못해? 왜 비행기를, 배를 못 타? 라고 묻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기다렸지만, 아직 만나진 못했어요.
그걸 못하는 사람에겐 그만의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두려움일 수도, 너무 일찍 깨친 인간의 본성일 수도, 무기력이나 슬픔일 수도, 모든 걸 남들보다 몇 배 크게 느끼는 감각일 수도 있어요.
차도 있고 짧은 거리는 곧잘 운전해요. 그러니까 저한테 왜 혼자 멀리 못 가? 라고 묻지 말아 주세요. 이유는 여기 다 썼으니까요.
어깨가 살짝 닿을 만큼 떨어져서 걸어요, 차가 없는 시절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것처럼 차가 가득한 세계로 와요. 구멍을 빠져나오면 다른 차원에 도착해 있는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