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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Apr 27. 2022

청춘 예찬  

<If I Could Meet Again - 푸딩>


객석불이 꺼지기 전이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을 못 만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대 쪽으로 나간 사람이 무대 아래 서서 관객석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말없는 눈이 빼곡한 자리를 훑으니 긴장 됐다. 이렇게 오래 찾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하는 걸 보면 만나기로 한 사람이 안 온 모양인데... 아직 못 온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뛰어오는 중일까, 불이 꺼지면 입장이 안될 텐데...  전에 와 주세요. 성사되지 않은 만남을 응원하는 마음이 됐다.


그가 말 한마디 없이 모두에게 말을 걸어서 그랬다. 오지 않 사람을 간절히 찾는 눈빛에서,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읽을 수 있었으니까. 모르는 사람의 눈을 그렇게 오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그는 간절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다른 사람의 시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표정 뒤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는 동안 그가 고등학생인 걸 알게 됐다. 교복 차림에 한쪽에 걸친 학생용 배낭도 그지만 무엇보다 십 대의 겁 없고 순수한, 보호해주고 싶은 얼굴이 나이를 말하고 있었다. 전성기 때의 디카프리오나 리버 피닉스처럼,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무심한 표정이 청춘의 분위기를 짙게 풍겼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도 야광이 아닌 이상 어둠 속에서까지 빛날 순 없다. 반쯤 포기한 듯한 망연한 표정이 허공을 헤매는 동안 극장이 점차 어두워졌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안 온 사람이 있어요, 외치고 싶었지만 다른 관객들의 마음도 나와 같을지 알 수 없었다. 망설이던 목구멍으로 말을 삼키는 동안 그의 얼굴이 완전히 어둠 속에 묻혔다. 잊기 힘든 얼굴이 될 거란 생각을 했던가, 무심함이 만드는 분위기가 얼마나 애타는지 알게 됐던가. 낯선 사람한테 반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났다. 처음인 것도 같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공연장 밖으로 나갔을까. 오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았으니 혼자 연극을 보는 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대가 오지 않을 걸 이미 알고 있어서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눈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는, 

연극에 집중할 때다. 큐피드가 계획을 가지고 도착한 여름밤이라 해도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고, 이루어지않은 사랑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첫 장면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불이 켜지고 보니 무대가 조금 바뀐 듯싶었는데, 무대가 바뀐 게 문제가 아니라, 아까의 학생이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게 문제였다. 갑자기 불이 꺼져서 어쩌지 못하고 몸이 굳었던 모양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짓고 있는 표정처럼, 나른한데 힘이 있고 낮은 건반을 누를 때처럼 뜻밖의 여운이 남는 목소리였다. 그가 뭐라고 한마디 하자 맞은편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배우가 태연하게 대꾸를 했다.


이후의 모든 연극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최초의 연극이 그렇게 시작다.



우리 동네

명호 동호 진호 성호 인호 상호 괄호 중에

내 이름은 괄호

나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바구니,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구니를 가지고 있죠

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괄호, 가장 커다란 바구니


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나로 인해 자라

잎사귀를 펼치고

열매를 매답니다


나는 괄호 내 이름은 괄호

나는 팔을 벌려 가슴을 넓힙니다

내 안에 들어오고 싶은 세상이

나를 만들었나 봐요


                                              - 괄호, 배수연



훗날 많은 영화에서 다양한 그의 인생을 만났지만, 나에게 늘 그가 청춘인 이유는 그날의 만남 때문이다. 누군가를 찾던 그와 그런 그를 응시하던 눈이 얽힌 순간, 청춘인지도 모르고 무대를 사이에 둔 나란한 청춘들이 있었다. 등 뒤에 꽃을 숨긴 사람처럼 들키고 싶은 마음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반인 채로 서성이다 어떤 말은 끝내 괄호 안에 넣고 만 순간이.


손을 들어 가릴 정도로 부신 건 아닌데, 눈을 가늘게 뜨고 싶은 밝기로 어떤 배우가 막 태어나는 , 탄생의 순간인  모르고 자리를 채운 목격자들이 숨죽여 바라봤다. 어거리는 달빛이 도시를 감싸, 도시에서 먼 숲과 바다에서 일제히 반짝이는 것들이 켜졌다.


연극의 제목은 '청춘 예찬', 학생의 이름은 박해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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