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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Jan 30. 2022

성실한 휴식


연휴의 좋은 점은 평소 시간이 부족해서 못하던 걸 시간 걱정 안 하고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며칠 전부터 벼르던 걸 하려고 길을 나선다. 길고 두툼한 외투는 넣어두어도 될 것 같아서, 늘 입다섯 겹에서 하나를 뺀 가벼운 차림으로, 장갑도 안 끼고 산책을 시작한다.


걷기 적당한 서늘한 날씨다. 드러난 목과 손등만 좀 시릴 뿐, 무언가에 감싸인 부분은 추위 대신 만난 상쾌한 공기에 푹 담글 수 있다. 멀리 가기에도 좋은 온도다. 십일월보다 기온은 낮지만 겨울의 시린 날씨에 단련된 몸은 일월의 날씨를 포근하게 느끼니까. 겨울이 시작되는 십일월이 내겐 훨씬 춥다.

양지는 손차양을 해야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부셔서, 그늘만 골라 디디는데도 가볼 데가 많다. 퇴근 후에만 걷다 모처럼 낮의 겨울 속을 걸으니 얼음을 깬 동치미를 들이켠 것처럼 시원하다. 몇 시간은 이렇게, 물도 휴식도 없이 걸을 수 있겠다.


자전거를 탄 뒷모습이 빛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멀어지고 드문드문 나타나는 자동차도 슬금슬금 지나간다. 나처럼 말없는 혼자들이 띄엄띄엄 떨어져서 서로의 공간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산책을 하고 있다. 완전한 침묵 -자신의 세계-에 몰두해 주변 소리에는 아랑곳 없이 걷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나한테만 들리는 소리와 함께 걷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곁을 스칠 때마다, 한 번도 겹친 적 없는 사람들 가까워졌다 멀어진다. 저마다의 침묵이 기억 못 할 만큼 짧은 순간, 가까운 거리에서 진동하다 사그라든다.


출근길에 다니지 않는 길로 들어서니 풍경이 지난 겨울과 달라 있어 외국어를 못하는 여행자처럼 두리번거리게 된다. 아는 길인데도 몰랐던 풍경, 어제까지 없던 장면이다. 겨울이라 꽃은 없지만 낙엽이랑 나무는 많다. 작은 실개천에 앉아있는 두루미도, 얌전한 까치랑 포르르 날아오르는 몸짓이 발랄한 참새도 거기 살고 있다.


두루미 흰 날개가 빛을 받아 탐스럽게 빛나는 걸 바라보다가, 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녹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개천 한쪽엔 얇은 얼음이 부서지기 직전의 전병처럼 슬렁슬렁 떠 있었는데, 다른 한쪽에선 녹는 중인 물이 낯선 사람한테 인사하는 활발한 청년처럼 반가운 소리를 다.

 


거기 뭐가 있어요?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가까이서 말을 건 게 오랜만이라 흠칫 놀랐다. 그래도 목소리가 너무 가냘프고 정겨워서 보이지 않는 입 대신 눈 힘껏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음이 녹아서요, 녹는 거 보고 있었어요.


으응... 내일부터 추워진다는데,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기온부터 보거든요. 오늘도 아침엔 추웠잖아. 내일은 더 추워져서 영하 11도라는데, 얼음이 녹으려나...

저도 아침에 일어나면 날씨부터 봐요, 라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내일은 더 따뜻하게 입어야겠어요,라고 대답한다. 내 말에 말을 계속 이어가려던 선량하고, 호기심 많고, 뭔가 더 말하고 싶 눈동자주머니 속에 우렁찬 벨 소리 들어 있다.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망설임 없는 손이 수락 버튼을 누른다. 기다리던 전화일 것이다.


어 그래, OO아, 엄마가 곰국은 끓여놨거든, 그거 먹는다고 하면 다시 끓이고. 응? 그래?

그럼 고기 재어 놓은 게 있으니까 그거를....

거기서부터 목소리가 멀어진다. 아쉬움과 안도를 담아 목례를 해보지만, 딸에게 먹일 곰국과 고기 생각에 미처 목례를 할 겨를이 없는 목소리가 종종 멀어진다.


목소리가 떠난 후에도 산책은 계속된다. 동네 주변을 샅샅이 훑고 다니느라 다양한 바람을 만난다. 할퀴는 바람, 쓰다듬는 바람, 멈춰있다 불쑥 놀라게 하는 바람, 꼬리를 흔들며 따라다니다 지쳐서 먼저 잠든 바람...

살짝 그을렸나 싶을 정도로 실컷 볕을 쬐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질 않아서, 다리 아파 멈춰 선 곳이 길 끝이 되는, 그런 길을 걷다 돌아온다.


추수가 끝난 언 땅을 꼭꼭 밟아 다지는 걸음들이 땅의 크기를 재는 파수꾼처럼 부지런한 오후다. 아직 쓸지 않은 낙엽이 푹신해서 발이 푹푹 빠지는 나직한 언덕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 마을이 손바닥만 하다.  속도면 도시도 금방 가 닿을 것 같다. 언덕 아래서 누군가, 거기 뭐가 있어요? 손나팔을 하고 물으면 말없이 여기 올라와 보라고 손짓을 하고 싶다. 그 사람이 더이상 묻지 않고 꼭대기까지 올라오면, 거기 나란히 서서 시간이 느려질 때 성큼 밀려오는 평야의 바다를 함께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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