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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Dec 21. 2021

장필순의 '어느새'를 좋아하나요


허빈 앤더슨의 그림을 본다. 좋아하는 이유는 많지만,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마음 풍경이랑 닮아서,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림들을.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흐린 날이었나, 구름이 쏟아질 것 같아서 하늘이 간신히 받치고 서 있는 오후였나. 눈부시면 세상의 경계들이 사라지지만 흐린 탓에 환상이 끼어들 틈도 없는 극사실주의 같은 날씨였나. 모던 아트의 검은 윤곽선처럼 짙고, 15 기압으로 뽑은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오후였나. 무선 이어폰이 없던 시절이라 한 줄에 붙은 이어폰을 나눠 끼려면 바짝 붙어 앉아야 했다. 각자의 이어폰이 있는데도 한 귀에 한 조각의 이어폰을 꽂는 건, 노래의 숨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읽고 싶단 뜻이겠지.


좋아하는 노래는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듣고 싶은 노래는 귀하다. 바래고 지워진 마음을 솜씨 좋게 복원시킨 목소리를 발견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진 않는다. 운 좋게 그런 일이 일어나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작 버튼을 누르고 나란히 귀를 기울인다. 그럴 때 풍경은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 지워지기도 하고, 어둠에 묻힌 밤인데 생생해지기도 했다.


단순한 물결이 작고 희미한 무늬를 만드는 강변에 앉아 윤슬을 바라보는 오후 같은 전주가 지나고, 깨끗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가 날개로 쓴 것 같은 한 마디가 허공에 피어오른다.

어느새.

노래는 그렇게 시작한다.

어느새, 라는 한 마디로.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마저 빼앗아, 에서 한숨을 참는다. 시간이 사랑보다 힘이 세지고, 어떤 것도 다 가져갈 수 있을 거란 말을 새겨듣기엔 너무 상쾌한 공기다.

나를 상심하게 만들었지만, 에서 잠깐 눈을 감고 노래에 집중할까 싶다가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눈을 깜빡이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진다.


다시, 어느새.


그리고 말이 없다.

이제는 가슴 시린 그런 기억조차도 모두 깨끗하게 잊어버린 무뎌진 사람이 돼 가네.

그때 우리는 무딘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상의 계절과 상관없이 우리 사이엔 생기발랄한 봄의 전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랑이 시작될 때 돋아나는 솜털 같은 게 있다면 그 솜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무렵이었다. 솜털이, 슬픔의 예고편을 모조리 흡수해 모르는 감정에 빠지는 걸 막아준 건지도 모른다. 무뎌진 사람이 되는 게 슬픈 건지, 슬픔을 고스란히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게 슬픈 건지 고민할 새도 없이. 슬픔은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으니까 없는 거나 다름없어서, 기쁨으로만 쌓아 올린 길을 걷는 사람처럼 굴었다.


보이지 않는  믿지 않던 마음이라, 아직 다가오지 않은 예감을 그렇게 예사롭게 나눌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배경음악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이 등장할 때 내 귀에만 그 음악이 들리기도 하고, 평소에는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진공 상태처럼 고요하던 사람이 오르골 상자에 숨겨둔 곡을 꺼내 나에게만 들려주기도 한다.


노래 '어느새'는 오랫동안 듣지 않았다. 잡을 수 없는 어느 새 한 마리가 모르는 새 날아가, 서로가 서로를 잊을 때쯤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본 거라 생각했다. 노래도 새처럼 조용히 엎디어 긴 세월을 열심히, 기어이 살아낸 후에 어느 늦은 금요일 밤-새벽에 더 가까운 시간-에 조용히 한 장 악보처럼 내 앞에 도착했을 것이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한 켐피스의 목소리는, 감은 머리를 말리며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볼 때 자주 떠오른다. 젖은 머리칼이 들러붙은 차가운 목덜미처럼 선명하게. 머리를 말리며 노래를 듣는 밤이 내 구석방이라 그럴 것이다.


어쩌면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듣던 날, 비가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빗방울이 우산에 투둑 투둑 떨어지는 소리가 간주에 섞여, 간주와 빗소리가 구별이 안 됐는지도. 세상의 다른 페이지는 다 젖었는데 둘이 앉은 자리만 지붕을 씌운 것처럼 고요하게 마른 시간, 하얗게 질리도록 우산을 쥔 손이 수백 번 들은 노래를 처음인 것처럼 듣던 시간이 지난다. 사람이 떠나면 앉았던 자리도 비에 젖는다. 노래를 잊을 때가 되어서야 그날을 찍은 한 장이 마른다. 잘 마른 사진을 앨범에 꽂는다. 부드러운 귓바퀴 속으로 이어폰 한쪽을 밀어 넣듯이.

내가 덮지도 않았는데 앨범이 닫힌다.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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