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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Nov 26. 2021

한스 짐머와 배유정의 영화 음악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와 '나 홀로 집에' OST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크리스마스는 존 윌리엄스의 곡들과 함께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11월에서 12월로 넘어가는 기분이 든다.


문학 잡지 Littor에서 '이제'라는 이름을 가진(이 이름이 얼마나 멋진가에 대해 출근길에 생각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소설가 '서이제'의 소설 '위시 리스트'를 읽었다. 주인공도, 주인공 친구도 나와 닮아 있어서 순식간에 빠져 들었고, 급하지 않은 일들을 뒤로 미뤄둔 채 단에 읽었다. 주인공과 내가 다른 점은, 주인공이 장바구니에 갖고 싶은 것들을 넣어두는 것으로 만족할 때 나는 인터넷으로 과감하게 베이지색 모직 슬랙스에 대한 결제를 마쳤다는 점이다.


단 하나의 모직 슬랙스를 찾는 일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이 어려움의 가장 곤란한 부분은, 완벽하지 않은 수십 벌의 바지를 거친 후에야 한 벌이 나에게 온다는 데 있다. 즉, 옷장에 안 입는 바지가 이층 높이로 쌓여야 만족스러운 바지 하나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어제는 한스 짐머의 <듄> OST를 듣다가 배유정이 떠올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새벽 세 시쯤 잠이 드는데, 그 디제이 배유정 덕이다. 배유정은 새벽 2시부터 3시 사이에 <배유정의 영화 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성실한 이 심야 방송은 세상의 모든 영화에 나오는 음악을 매일 들려주었다. 영화나 영화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영화의 장면을 재연해보기도 했다. 드물게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어주다 가끔 시도 읽어줬는데, 밤과 시가 함께 하는 순간이 얼마나 근사하던지. 활자가 아닌 음성으로 만나는 시에 반한 순간은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좋아하는 음악 장르를 물으면, 영화 음악이라고 답하는 게 부끄러웠다. 영화 음악이라고 하면 대부분 어떤 영화의...?라고 질문을 이어갔는데, 그러면 특정 영화의 OST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음악을 좋아하는 거란 사실을 설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작곡가의 이름과 곡명을 댈 수 없는 장르라는 게, 그 장르에 대한 나의 애정을 숨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영화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다.


생각해 보면, 밤도 아침도 아닌 2시에서 3시 사이의 고요함 속에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과, 나와, 디제이만 존재하는 기분이 좋았던 거다. 여름엔 창으로 살랑이는 밤바람이 들어와 기분을 돋우었고, 겨울엔 따뜻한 방에서 상기된 뺨 더 붉어질 정도로 집중했다. 집중한 얼굴로 익숙한 오프닝 음악을 따라가 영화와 음악 사이에 난 골목길을 걸어가는 발자국에 귀를 기울였다.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을 호출해내고, 아직 못 본 영화를 꼭 보고 싶어 주먹 불끈 쥐게 만드는 한 시간이 지나야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다짐과 추억 속을 돌아다니느라 고단해진 마음이 영화를 닮은 꿈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그때 열렸다.


문제집과 연습장과 노트를 책상에 보란 듯이 펼쳐놓은 채로 집중한 얼굴이어서, 방문을 열어본 사람은 내가 그때까지 공부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책만 펼쳐놓고 매일 밤 라디오를 듣고 있단 걸 들킨 뒤로 라디오를 압수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소형 라디오를 구해 서랍에 넣어두고, 식구들이 모든 잠든 후에 홀로 영화 음악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요즘 OBS 경인 TV에서 하는 '전기현의 씨네뮤직'이 그때의 그 방송과 가장 닮았다. 어떤 부분은 더 좋기도 하지만, 데일리 프로가 아니고 무엇보다 심야 방송의 비밀 데이트 같은 느낌이 없어 아쉽다. 이제 누가 무슨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최근엔 한스 짐머의 <듄> OST가 좋더라고요. 들어보셨어요?"라고 대답할 텐데,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지 않는다. 유튜브 알고리즘만이 열심히 내 취향을 모아, 잊고 있던 내 욕망의 기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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