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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Nov 26. 2021

시인의 목소리

황인찬 시인과 함께 걷는 밤


사람들은 자주 내 목소리에 대해 말했다. 얼굴을 오래 본 사이여도 전화 목소리가 육성과 다르다고 했고, 얼굴을 본 적 없는 이는 직접 얼굴 보면 실망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타인의 귀에 가 닿는 목소리와 내가 듣는 내 목소리가 다르다는 건 정말 신비로운 일이다. 내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목소리 하나를 더 가진 존재가 된 것 같다. 영영 들을 수 없는 내 목소리에 대해 사람들이 말할 때, 나도 그 말을 하는 타인의 목소리를 조용히 음미한다.


추워지면서 지난달에 비해 밤 산책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었다. 어제는 좀 늦은 시간에 나섰더니, 한 시간이나 동네를 돌아다녔는데도 겨우 세 명 마주쳤다. 혼자 걸을 때 털옷이나 핫팩보다 더 위로가 되는 건 다른 사람의 목소리다. 장거리 운전자의 차창에 한 장의 그림으로 스칠 뿐인 길 위를 내 속도로 지나가며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과 나, 둘이서만 그 길을 걷는 기분이 된다. 우우웅, 하는 낮고 거대한 대형 화물차 엔진 소리가 지운 한 마디를 빈칸으로 남겨 두고 다음 구절을 듣는다. 잔잔한 열정과 평온한 격정이 시가 되는 순간을 듣는다.


시인은 어린 시절 얘기부터 즐겨 먹는 빵과 못 먹는 과일 이야기, 혼자 사는 일의 만족과 부족, 이루지 못한 사랑과 농구를 좋아하는 동생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좋아하는 시를 한 편 읽고 나서, 그 시를 읽으며 떠올랐던 생각을 들려주는데 가끔 그 부분도 시처럼 느껴진다.

목소리 미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시인이 그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텅 빈 밤을 채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믿음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어깨를 기댄 기분이 들 정도로.


만나본 적 없고 만날 일도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이렇게 오래 많이 들은 건 디제이 유희열의 목소리 이후 처음이다. 그가 라디오를 떠난 후 한동안 마음에 드는 목소리를 못 찾아 방황의 시기를 보냈고, 우연히 황인찬 시인의 목소리를 들은 후 방황을 끝냈다. 그의 목소리는 다락 깊은 상자 안에 넣어두고 소중한 친구가 왔을 때만 조심히 틀어보는 LP 같다. 가끔은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산책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올라오는 그의 오디오 클립이 어느 정도 모여야 산책을 간다.


바깥 기온을 체크하고 종아리를 덮는 부츠를 신고 장갑을 낀다. 헤드폰이 가장 중요한데, 한 시간 동안 그와 함께 걸으려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걸으며 듣다가 아름다운 구절이 나오면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면 그도 잠깐 숨을 고르고, 천천히 다음 구절을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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