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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May 16. 2022

남부 터미널 일곱 시 삼십 분의 이별


막차라는 단어는 쓸쓸하다. 종점이나 차고지라는 단어처럼. 모든 막차는 세상 끝에서 출발해서 다시 거기로 돌아가려는 사람을 태우러 오는 것처럼 먹먹하다.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요, 라고 말하는 종소리처럼. 그 소리는 막차를 놓칠 거면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릴 용기가 있어야 할 거라는, 지구 자오선처럼 분명한 선언이다. 아무리 다정한 말투로 해도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나야 하는 안전선 같다.


그 시간 차가 막차야.


 말을 듣고도 다음 차 타, 라고 말하는 건  밤을 고스란히 나한테 줘, 라고 말하는 게 된다. 막차 시간을 알고 나면 모든 스케줄은 재조정된다. 깎이고 닦 충분히 매끈해져서 손에 쥐기 좋은 조약돌의 몸을 갖게 된 시간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의 조약돌을 행선지까지 운반할 임무를 띤 사람처럼 그때부터 모든 시간은 막차 시간을 향해 달린다.


하는 바람이 한 바퀴 몸을 휘감으면 휙 벗겨질 것 같은 얇은 셔츠를 입고 왔다.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해서 나만 재킷을 입은 게 미안해졌다.

옷부터 사러 가자. 진심이었는데 하는 도리질을 했다.


별로 안 추워.


하가 이끄는 대로 처음 보는 골목을 몇 개 통과하자 순식간에 역에 도착해서,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게 뭐야? 축지법 같은 건가?

여긴 내 나와바리니까. 말하고 나서 하는, 이런 비속어를 쓰다니... 하고 머뭇거렸다. 나도 가끔 써, 라고 말해야 했는데 뭐 어때, 라고 말하고 말았다. 전철엔 앉을 자리가 없었고 서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모처럼 자리가 나자 하가 나를 앉히려 했다. 앉아서 이거 좀 들어줘, 하자 겨우 자리에 앉은 하가 한 정거장도 못 가 일어났다.


서 있을래.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나는 당황했다. 하는 눈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해야 이야기가 이어지는 사람처럼 다시 내 눈이 닿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제 지상으로 나왔어. 창밖 봐.

버스를 타면 창밖을 볼 수 있어 좋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도 다 기억해서 나를 놀라게 하는 사람.


다음 역인가 봐. 우리는 사람들 사이로 힐끔, 다음 역 이름을 보고 내릴 채비를 했다. 채비라야 들고 있던 영화 포스터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꿔 든 게 다지만. 막차 시간까지는 이제 한 시간 정도 남았다. 하는 내게 맛있는 걸 사주고 싶다고 했다.

저기 갈까? 내가 가리킨 간판을 보고 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맛있는 거 사주고 싶은데.

저게 맛있는 거지. 따뜻하고 국물 있고 밥도 있고. 더 바랄 게 없어.


가까운 국밥 집에 들어갔다. 국밥은 금방 나왔는데 부추랑 깍두기를 더 먹으려면 직접 반찬을 담는 셀프 코너에 가야 했다. 셀프 코너에 어르신 한 분이 서 계셔서 우리는 뒤에 섰다. 한참 거기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가. 아주머니 한 분이 손짓으로, 이쪽에 와 반찬을 가져가라고 하셨다.


우리 보고 계셨나 봐! 섬세하시다... 나는 부추 많이 줘, 진짜 많이.

그렇게 말하고 나는 깍두기를 담뿍 떴다.

무로 만든 다 좋아, 이런 건 김장 김치랑 달라서 누가 담가 주지도 않으니까.

부추를 다 담은 하가 그걸 다 먹을 수 있어? 하는 눈빛으로 깍두기 접시를 봤다. 그 표정을 보니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이미 담은 걸 덜 수도 없었다. 나는 작심한 사람처럼 깍두기를 기 시작했다. 국밥 한 숟갈에 깍두기 하나, 다시 한 숟갈에 네모난 깍두기 한 쪽, 또 한 번 아삭아삭하고 달콤해서 사과 같은 깍두기를...


이거 먹어봐. 진짜 맛있어.

그렇게 권해도 하는 열 숟갈에 겨우 깍두기 하나 먹을까 말까 해서, 넘치게 담은 깍두기는 여지없이 내 차지였다. 고봉으로 담은 깍두기 한 그릇에 국밥 한 그릇을 배불리 먹고(그쯤 되니 뭐 때문에 배부른 건지 모를 정도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삼십 분도 남지 않았다.


하는 막차 시간 15분 전으로 알람을 맞춰 놨다며 느긋해했다.

15분? 20분 전에는 가야지. 

바로 앞인데 뭐.


우리는 20분 전에 식당을 나섰다. 식당에서 그렇게 재촉을 해놓고 나는, 하에게 도넛을 사주겠다고 우겨 기어이 도넛 가게에 들어다. 따라 들어온 하도 나한테 도넛을 사주겠다고 해서 결국 피카츄가 그려진 노랗고 납작한 상자를 하나씩 손에 들게 되었다. 상자에 피카츄가 있으니 이게 포켓몬 빵이지 뭐냐는 농담을 하며 우리는 뿌듯하게 웃었다. 상자는 옆으로 긴 데다, 손잡이 부분까지 다 얇은 종이로 되어 있었다. 조금만 기울여도 말랑한 도넛이 망가지든 가냘픈 상자가 찌그러지든 둘 중 하나일 것 같아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졌다.


막차 시간까지 15분 남았지만 길만 건너면 되니까 여유가 있었다. 8번 출구를 찾는 하에게, 저기네! 저기가 8번이야, 득의양양하게 외치고 건널목 앞에 서는데 하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여기... 남부 터미널이 아니야.

응?

아까 전철역에서 나올 때, 내가 여기 꼭 교대 같다고 했잖아.


기억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도.


한 정거장 차이니까 비슷한 분위가 봐. 직장인들이 여기까지 밥 먹으러 와서 식당도 많은가 보다.

그때 하도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람이 얼마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지, 그게 내 경우가 되면 얼마나 시야가 좁아지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숫자 바로 옆의 문자를 그렇게 무시하다니. 숫자 8을 찾아서 기뻤던 나는 8번 출구 옆의 '교대'라는 글씨는 보지 못했다. 나는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는데 하는 태연했다. 태연한 걸 넘어 갑자기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어쩐지 교대 같더라니.

내 말만 듣고 교대를 남부 터미널 철같이 믿은 하는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의 회로가 사이렌을 울리경고등을 깜빡였다. 하는 여전히 웃는 중이었고, 택시를 잡자고 했더니 인터넷 접속이 안돼서 앱이 안 열린다고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나한테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하는 여유까지 있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걸 보니 내가 모르는)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마음먹으면 서울에 잘 데는 많으니까.

무슨 소리야. 여기서 내가 너를 다른 데 보내겠어? 차 못 타면 내가 책임져야지.

그래서 그런 거야? 나 책임지기 싫어서?

응, 너 오늘 못 가면 나랑 결혼해야 돼.


이미 결혼한 하는 더 크게 웃기 시작했고, 때마침 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7시 27분에 남부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미친듯이 하가 가야 할 도시 이름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는데 하는 한없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와 왜 그렇게 서두르냐고 물었다.

3분 남았어. 못 탈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7분 남았어.

그랬다. 시계를 보니 정말 7분 전. 택시 안에서 7시 27분이라는 숫자를 보고 나서 나만 꼼짝없이 거기 사로잡힌 였다.


우리는 버스 안과 밖에서 서로를 찍었는데, 사진 흐릿한 데다 흔들리기까지 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헤어질 때 완벽한 사진을 찍는 사람은 틀림없이 냉정한 사람일 거라는 농담을 할 새도 없이 버스가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7시 30분.


오월의 오후 일곱 시 삼십 분은 아직 먹 같은, 멍 같은 밤이 오기 전. 내가 선 곳에서 세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선 사람이 같은 버스를 향해 수줍게 손을 올렸다 내렸다. 버스 안의 누군가 이쪽을 향해 맹렬히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더 열심히 손을 흔들어야 상대가 더 기뻐하는 경쟁도 아닌데 질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두 손을 다 움직이고 싶었지만 내 손엔 여전히 납작하고 아슬아슬한 피카츄가 들려 있었고, 돌돌 말면 구겨질까 봐 종일 펼친 채로 모시고 다닌 영화 포스터에, 이런저런 짐이 가득 든 가방까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한 손을 힘껏 흔들었다. 이 각도만큼 너한테 가까이, 다시 만날 날까지 훌쩍, 다가갈 거란 신호를 보내듯이 크게 크게. 옆에 섰던 청년이 뒤돌아 출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가 한번 더 뒤돌아보기라도 할 것처럼 거기 붙박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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