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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Apr 30. 2022

한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은, 눈의 처진 각도부터 둥글고 작은 발톱까지 다 좋은 사람을 종종 잊기도 하는 일은 정말 이상하죠. 연속극이 끝나 닫히는 밤이나 드라마를 젖혀야 열리는 아침, 할머니는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다고 했어요. 우리 강아지 하는 데 방해될까 봐, 늦게까지 일하고 지쳐 자는데 아침잠을 깨울까 봐 참고, 또 참다 보면 계절이 가기도 한다고요.


이는 누구한테 사랑을 배웠을까, 싶은 사람이 있어요. 짐작도 못 한 표현을, 엄두도 못 낼 깊이의 감동을 그들은 언제어디서나 지니고 있어요. 이름이나 이마나 인상처럼.

넌 누구한테 사랑을 배웠어?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어? 그런 걸 묻진 않았어요. 그 사람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의 진하고 깊은 부분이 말없이 번져서 스몄거든요. 그렇게 나도 모르 색이 달라진 마음데리몇 계절을 나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 옆에 서면 절절 끓고, 어떤 사람 앞에서는 불 뺀 골방처럼 서늘해지는 마음도 만났어요. 의 마루처럼 잠들기 좋은 마음도, 울창해서 그늘이 깊은 마음, 황량해서 바람이 헤매기 좋은 마음도 있었죠. 바깥 계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도 봤고요.


뭉근히 끓어 다친 속을 데울 음식을 만들고, 펄펄 올라오는 흰 김에 언 발을 녹게 하고, 둥근 방을 밥그릇처럼 은근 덥히는 온도. 잠깐 졸아도 며칠 내리 잔 것처럼 가뿐해지는 온도. 그 온도의 순간끝내 다다르지 못하는 사람 곁에 있는 건 참... 가을 같어요. 무르익 수확하고 쌓아두는 가을이 다 지나간 다음, 눈썹까지 어는 계절이 가까워 온다는 기척만 남은 가을이요.


그럴 때 혼자 아궁이에 불을 때려면 먼 데까지 땔감을 구하러 가야 했어요. 빈 지게를 고, 부르튼 손등은 소매를 끌어내려 덮고, 자꾸 벗겨지는 신을 신고 걸어가는 멀고 먼... 산길. 콧노래 말고는 동행이 없어, 잦아들다 끊어졌다 불쑥 이어지는 콧노래와 함께 미끄러지는 지게를 추어올리며 걷던 길.


버스도 기차도 지나다니는 차도 없어서, 드나드는 걸음이 뜸해 매일 지워지는 길 위를 걸을 때 할머니를 생각했어요. 나에게 스민 누군가의 마음으로 내가 이만큼 살았다면, 그 마음의 주인은 할머니일 거라는 생각을요. 물들고 싶고, 같은 으로 접히고 싶고, 뿌리째 뽑혀 옮겨져도 거기면 안심인, 할머니 곁.


나무는 집으로 갈 수가 없어서 스스로 집이 된다고 누가 말했던가요. 집인 나무는 몸 전체가 표정이기도, 입구이기도, 경계이기도 해서 모든 날씨의 기억을 갖고 있어요.

 나보다 많은 어제를 갖고 있어서,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나무를 찾아가요. 그럴 때 나무 바람에 목소리를 실어 보내기도 해요. 오래전부터 나는 네 터고, 숨이고, 창이었다고.

나무 밑에서 땀을 닦목소리를 못 알아듣고


아, 참 좋은 산들바람이야,

나무도 분이 좋아서 손을 흔드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죠.


할머니,

저는 몇 분의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분들은 언제나 이름을 물어요. 기억의 다락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름의 보드라운 티끌을 털어주듯이. 이름을 몇 번 중얼거려 보시고 나선 나이를, 사는 곳을, 여기 어떻게 왔나를 물어요. 와줘서 고맙다, 참 이쁘구나, 그리고 나서 다시... 처음인 것처럼 이름을 물어요.

제가 발음하는 이름이 아는 이름이기를, 기다리는 이름이기를 바라질문  나중에 알았어요. 할머니들은 언제나 기다리는 이름이 있어요.


오늘은 그 이름이 온다고 했는데... 아닌가, 시간이 지났나. 그런데 지금 몇 시지?


그때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은, 기다리사람이 안 탄 차의 번호판이나, 연결이 안 되는 전화번호나, 약속 날짜에서 한참 지 날짜 같은 거였어요. 보이지 않는 기다림을 눈에 보이는 숫자로 바꾼 세상에서 할머니들은, 기다리던 이름이 가 아닌 걸 알고 나면 말이 없어지셨어요.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세상이 어떤 건지 저는 몰라요. 볼륨을 줄이고 줄여서 마지막 한 칸이 남으면... 사람들의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가는 방향, 몸을 돌릴 때 일어나는 바람, 눈을 깜빡이는 속도와 손잡이를 잡는 손의 떨림 같은 걸로 분위기를 짐작할 뿐이죠. 짐작이 오해가 되지 않게 섣불리 입을 열지 않게 되고요.


그럴 때 할머니 생각을 했어요. 내가 누군가를 오해하고 실망시키고 단념는 동안 느낀 마음을 할머니는 내내 느끼겠구나. 할머니는 이 세계에 머무시는구나, 바람에 말을 실어 보내는 고요한 나무처럼.


미안해요 할머니, 전화를 못 받았어요. 할머니한테 전화는 기다리다 지쳐서 작게 불러보는 이름 같은 건데. 옆으로 누워 드라마를 보다 스르르 잠든 할머니의 팔을, 종아리를 쓸어보지 못해 미안해요. 아무리 만져도 귀찮으니 저리 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사랑하면 다 그런 건 줄 알았어요. 늘 닿아있고, 옆에 있어도 기다리고, 어쩌다 전화를 못 받으면 종일 구멍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마음이 되는 거요. 그 사람의 콧노래가, 혼자 가는 산길에서 부는 호루라기가 아니라 기쁨에 겨워 터져 나오는 탄성이기를 바라는 마음 되는 거요.


할머니.

팥죽을 끓이는 할머니 옆에서 호박죽이 더 좋다고 떼를 써서 미안해요. 고기 없이 쌈채소만으로 어떻게 밥을 먹냐고 말해서, 할머니를 슬프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할머니의 딸인 엄마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해 미안해요. 사실은 그래서

전화를 다시 못 걸었어요. 할머니가 엄마를 부탁한다고 말하면, 아무리 화나고 억울한 기분이 들어도 할머니 말을 모른 척할 수 없고, 그러면 부서진 것들에 찔린 기분이  걸 알아서요.


그 기분을 잊으려고 나무가 사는 나무의 집에 놀러 갔어요. 열쇠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할머니와의 기억을 뒤지면서 걷다가, 집에서 점점 더 멀어졌어요.


할머니는 언제나 제가 만든 건 다 맛있다고 하셨죠. 육수가 제대로 우러나지 않은 칼국수도, 파보다 밀가루가 많은 파전도, 너무 매워서 밥보다 물을 더 많이 먹어야 하는 양념 주꾸미도 다... 제가 만들었기 때문에 맛있다고. 할머니 손을 놓칠까 봐 꼭 잡고 있던 작은 손으로 뭘 조물딱조물딱 만들어내는 게 신기해서 다 맛있다고, 그러셨죠.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 할머니가 참말 곱다고 하거나, 할머니한테 앙증맞은 화과자 같은 걸 드리면 기분이 좋았어요. 누굴 좋아하면 나한테 잘해주는 것보다 그 사람한테 잘해주는 게 더 고맙고 기쁘구나, 하는 걸 그때 알았어요. 할머니가 친구들한테 제 자랑을 하며 커튼 걷은 아침처럼 환 표정이 되는 게 좋았어요.


그러니까 할머니, 한 번만 더 전화해 주세요.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우리 얘기만 해요. 드라마 얘기만, 끼니 얘기만, 거기랑 여기 날씨가 어떻게 다른지만, 할머니의 기쁨과 자랑에 대해서만 들려주세요. 우리 질문과 대답이 하나도 들어맞지 않고, 자꾸 목소리가 겹쳐도 좋거예요. 겹치는 목소리 뒤로 어떤 장면이 보일 테니까요.

 할머니 손을 잡고 퇴근하는 할아버지 마중을 나가던 그 저녁, 할머니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제가요.


할머, 저기 할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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