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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Apr 16. 2022

여자 친구 철수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할 때는 다른 사람을 이야기할 때보다 조금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가장 좋은 순간과 가장 나쁜 장면에 함께 담겨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 그렇다.


프로이트가 말한 사춘기의 사랑은 동성을 흠모하는 데서 출발한다. 동성을 깊이 사랑한 연후에야 진짜 연인을 만나게 된다는 게 프로이트의 이론인데, 여학교에 가 보면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게 된다. 어느 반에나 소녀들의 주목을 받는 소녀, 선물과 편지가 서랍에 가득한 아이들이 있다.


나 역시 소년 같은 소녀들에 끌려, 씩씩하고 건강한 친구를 남몰래 좋아했(지만 언제나 들켰)다. 과묵하고 운동을 잘하는 그 애들은 사심 없이 나를 친구로 대했지만, 나는 사심이 있었다. 둘이서 뭘 먹거나 놀러라도 가게 되면 얼굴부터 빨개지고 평소의 나보다 훨씬 더 말수가 적어지는 이유가 뭔지는 몰랐지만.


스무 살, 서툰 화장과 전공 서적과 미니스커트의 시절로 친구들이 건너가는 동안, 나는 회색 추리닝을 입고 기숙 학원의 재수생이 되었다. 학원이 아무리 단속해도, 감출 수 없는 풋풋함과 설렘이 도처에 만발해 연애가 피어났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스물이 되어 학교도 사회도 아닌 곳에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 시절, 내가 사랑한 건 철수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못 거는 성격이라, 어차피 친구 사귀러 온 게 아니니까... 생각하며 혼자 지낼 작정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친해질 예감이 드는 얼굴이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철수가 어느 밤, 이층 침대 몇 칸을 풀쩍 건너와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초콜릿 먹을래?


단 걸 싫어하진 않지만 잠들기 직전에 침대에서 먹는 초콜릿은 내키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너 먹는 거 봐줄게.


초콜릿 먹는 걸 왜 봐준단 말인가. 설마 안 씹고 삼킬까 봐, 가루가 떨어져서 녹을까 봐?


내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껍질을 능숙하게 벗긴 철수가 초콜릿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대로 철수가 초콜릿 바를 느리고 우아하게, 하지만 마지막 한 조각까지 확실히 씹어 삼키는 걸 바라보았다. 다 보고 나서, 박수를... 아니, 감탄을 하며 말했다.


너 정말, 초콜릿 잘 먹는다.


초콜릿을 잘 먹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은 철수를 보면 된다. 박자가 끊어지지 않으면서 리듬이 있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놓치는 게 없는데, 먹고 난 뒤의 깔끔한 뒤처리와 바로 누워도 끄떡없는 소화력까지 더해지면 마치 초콜릿 쇼를 보는 기분, 보는 것만으로 배부른 느낌이 된다.

 

그날 이후 철수 먹고, 나는 하늘 자전거를 타 하나 마나 한, 내용 없는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갓 스물이 인생을 얼마나 알까마는, 모르는 것 투성이라 서로의 카드를 한 장씩 뒤집는 게 재밌었다. 우리는 다른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왔고, 좋아하는 음악부터 싫어하는 과목까지 모든 게 다 달랐다. 근육질에 각이 많은 철수와 근육이 없고 잘 휘어지기만 하는 나는 닮은 게 없어 서로가 흥미로웠다.


커튼 뒤에서 사감 선생님이 누가 안 자고 떠느니? 하시면, 우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킥킥대며 소곤댔다. 작게 말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하던 얘기를 그만둘 순 없었다. 사람의 목소리 말고는 재밌는 게 아무 것도 없던 였다. 티비도 라디오도 매점도 없는 곳이라 우리 스스로 드라마를, 군것질거리를,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을 만들어내야 했다. 만들어낸 세계는 오월의 해먹처럼 아늑하고 우리뿐인데다 입맛대로 매일 바꿀 수 있어서, 바깥 세상보다 안전하고 비밀스러웠다. 어떤 어른도 거기까지 들어올 순 없었다.


친구를 잃는 건 연인을 잃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연인과 헤어지는 게 하나의 문이 닫히고 어떤 세계에 다시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거라면 친구를 잃는 건, 모든 문이 다 사라진 세계에 나만 덩그러니 남는 일이다.


우리는 배낭을 메고 지구를 같이 돌았고, 낯선 사람과 지도에 없는 골목과 허우적대던 물 속과 야간 기차에서 서로를 구했다. 어떤 영화를 볼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잡았고 어떤 미술관에선 작품보다 서로의 발에 잡힌 물집을 더 오래 쳐다다. 다른 친구랑 친하게 지내는 서로를 보면 뭔가 뺏긴 기분이 들었고, 그 기분을 인정하기 싫어 태연한 척 하느라 속을 끓였다. 아무리 시커메진 속도 결국 서로의 곁으로 돌아오면 멀쩡해지는 건 변함없었고, 그때야 비로소 두려움 없이 살아갈 기분이 됐다. 서로의 연인이 우정에 기여한 바 없듯, 방해가 된 적도 없었다.


그러다 그 사람이 나타났다, 철수의 마지막 연인. 그를 처음 만나고 온 날, 철수의 얼굴이 사랑에 빠진 얼굴이 아니었던 건 기억난다. 어떤 진짜는 처음부터 오리지널리티를 드러내지 않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진짜 연애는 그렇게 왔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삶을 송두리째 들었다 놓고, 식성과 취향, 인생 계획과 결혼관, 직업과 우정의 정의까지 바꿔 놓는 형태로.


하필이면 오랜 연인과 헤어져 눈물로 지새우던 즈음이었다. 철수는 행복해 견딜 수 없단 얼굴로 그를 나에게 소개하겠다 했고, 내 마음이 어떤지는 묻지 않았다. 밥을 남기기만 해도 어디 아프냐고 걱정을 하고, 추운 날 얇게 입고 오면 너 땜에 내가 못 살아, 하며 옷을 벗어주던  누구였을까. 철수는 등을 보이고 그이 쪽으로 돌아앉아 있느라 내 마음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철수의 맹목은 급기야 그와 나를 동시에 집으로 초대한 날, 내가 입고 온 옷이 마음에 안 들어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는 데 이르렀다. 땀을 많이 흘려서 갈아입는 게 좋겠다고 말했지만  입고 있는 옷이 마음에 안 든 거라는 걸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더한 땀도, 더한 노출도, 더 심한 일탈도 함께 한 우리였는데 이제 나는 철수의 남자 친구 앞에서 민소매 옷도 입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철수의 방은 온통 그와 찍은 사진, 나와 함께 간 여행에서 내가 찍어준 그녀의 독사진들로 꾸며져 있었다. 나랑 찍은 사진이 한 장이라도 있었으면 기분이 좀 달랐을까.

그날의 메뉴도 당연히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철수는 나에게 베이컨 속에 떡을 넣고 말아 굽는 일과 볶음밥에 들어갈 재료를 써는 일을 맡겼다. 맛있는 음식들이었지만, 내가 먹고 싶은 건 아니었다. 요즘 입맛이 없어 시원하고 상큼한 게 먹고 싶다는 말을 하는 대신, 나는 요리하는 내내 철수의 그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들어야했다.

맛을 느낄 수 없던 저녁을 물리고, 둘만의 시간을 주려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들어갔다. 문 들어서는 내 앞으로 철수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이가 설거지 다 했어. 넌 편하게 쉬다 왔어?


우정이야말로 사랑이 끝나도 지속되는 것이니, 우정 최고 우정 만세를 외치던 나는 도리 없이 슬퍼졌다. 우정은 사랑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우정인 거구나, 하필 나는 지금 사랑이 없고...


우리는 사이를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서운함을 표현하다, 소리치며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철수의 결혼식에서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미 울 만큼 운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철수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간 걸 잊으려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랑 아무 얘기나 열심히 했다. 식이 끝나고 연회복으로 갈아입은 철수가 내 쪽으로 다가와 은근히 물었다.


너 저 사람 마음에 들어?


그렇게 철수는 나를 몰랐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알던 사람이 모르는 표정을 하고 총총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건 비현실적이었다. 철수는 샴푸와 바디 샴푸를 로고가 없는 우아한 공병에 넣고 식사 때마다 반짝이는 커트러리를 꺼내놓는 세계로 떠났다.


너는 어떻게 친구란 말을 그렇게 쉽게 해? 이해가 안 가. 친구는 오래 사귄 사람한테 하는 말이잖아.


오늘 만난 사람도 마음에 들면 친구라 부르는 나에게 철수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너만 친구라고 부르는데, 너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오늘 만난 사람도 다 친구고... 도대체... 나는 뭐야?


누가 누굴 더 좋아고, 누가 누굴 먼저 떠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도 모른다. 회색 추리닝과 슬리퍼의 나날에 이렇게 말하던 철수를 잊으려고도 해 보았다.


너 이 옷, 내일 하루만 더 입으면 안 돼?

왜?

그 옷 입으면 예뻐서.


사흘이나 같은 옷을 입게 하고, 기차역에서 각자의 도시로 떠날 때 플랫폼까지 내려가 손을 흔들게 하던 철수는 내가 브런치에 몸담은 걸 모를 테니, 이 글을 읽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비밀만 지켜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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