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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Mar 31. 2022

사소함은 사소해서 사라지지 않아

<포켓몬 빵>


내내 사소한 이야기를 써놓고 이렇게 사소한 걸 도 될까, 하는 고민을 며칠이나 했다. 사소할 뿐 아니라 누구도 궁금해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런데도 쓰는 건, 훗날 많은 게 희미해졌을 때 이 글이 지금의 나를 보여주는 무늬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추운 날들이 다 지나갔는데 긴 외투를 꺼내 입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단단히 잠갔다. 혹시 몰라 이어폰과 책도 챙겼다. 태연한 눈빛을 하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결연한 입로 집을 나섰다. 경비실 앞을 지날 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아저씨가 스쾃을 하고 계셨다. 힘내세요 아저씨,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이면 의아해하실 것 같아 눈으로만 인사했다. 일별하고 길 건너 편의점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신호등 색이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누가 나보다 먼저 거기 도착할까 봐 조마조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저씨 한 분이 사장님과 마주서 계다. 친분 있는 사이 근황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거면 좋겠는데, 대화 끝에 들리는 단어들이 내가 염려하던 바로 그 단어들이다.


... 그러면 언제쯤 와야...

... 한 시간은 기다리셔야...


얼마 전부터, 편의점을 가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c가 먹고 싶다고 한 빵을 구해오는 게 그것이다. 편의점과 마트는 둘러만 보고 나가는 손님들에 지쳤는지, 헛걸음하지 마시라는 의미인지, 일제히 문 앞에 포켓몬 빵 없어요- 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았다.

밤에 가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또 갔다. 그날은 운이 좋았는지, 곧 빵을 실은 트럭이 도착할 거란 정보를 얻었다. 기다리기로 마음먹고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 발차기 연습을 하거나(태권도 유단자인가 보다), 통화를 하거나(상대가 엄마인지 애인인지 모르겠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떠들거나, 컵라면을 먹으며(나도 배가 고파 온다) 그들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잠시 후 벌어질 일을 몰랐다.


c가 얼마나 좋아할까. 슬쩍 흘리듯 한 말도 잊지 않고 이렇게 쌀쌀한 밤, 맨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린 걸 알면 감동하겠지.


시간이 흐르자 크고 흰 트럭 한 대가 편의점 앞에 섰다. 겹쳐진 플라스틱 박스 대여섯 개가 트럭에서 내려지자 모여있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박스를 둘러쌌다. 나도 마음을 굳게 먹고 그 대열에 끼었다. 선두에 선 사장님이 그날의 입고 상품이 적힌 종이를 합격 통지서처럼 높이 들고 외쳤다.


오늘은 세 개 들어왔네요.

세 명만 살 수 있습니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손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동시에 빵 세 개를 집었다. 키도 덩치도 그들보다 작은 나는 삽시간에 뒤로 밀렸다.


저도 삼십 분 전부터 기다렸는데요.

저 학생들은 한 시간도 더 기다렸어요. 어쩔 수 없어요. 다들 사정이 있으니까 먼저 온 순서대로 사는 수밖에.


손으로 나오기 아쉬워 별로 먹고 싶지 않던 과자와 바나나 우유를 사 가지고 나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빨리 포기하고 돌아서지 못한 나의 미련과 욕심이, 봉투 안에 엉뚱한 물건으로 담겨 걸을 때마다 조용히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세계는 중대하고 무거운 문제들로 신음하고 고통받고 있는데 빵 하나 때문에 속이 상해버린 나는 얼마나 작고 가벼운가.


실망과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돌아와, 비닐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털썩 앉았다. 지쳐서 아무렇게나 눕고 싶었는데, 한편 그렇게까지 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일었다. 누군지 모르는 상대한테 지고 돌아온 기분인데 상대의 정체를 모르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다음날은 트럭이 늦어서 꼬박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트럭에서 내려진 빵은 두 개뿐이었다. 둘 중 하나를 집어 들고 기쁨과 미안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돌아섰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빵을 사지 못한 학생한테 작게 말했다.

미안해요, 나만 사서.

괜찮아요. 전 여덟 번이나 사 먹었어요.


우선 사진을 찍었다. 빵의 얼굴엔 미소도 환희도 없으니까 대신 내가 그걸 사진으로 표현해야 했다. 사람을 찍듯 신중하게 옆모습과 뒷모습을 찍 동안 빵은 말이 없었다. 다 찍고 나서 조심히 빵을 들여다보았다. 빵의 몸통은 단단히 말려있었지만, 표면은 포크로 살짝 눌러도 자국이 남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한 번도 갖고 싶적 없던 사물이, 아끼는 사람의 "갖고 싶어." 한 마디에 나의 욕망이 는 것에 대해 생각다. 그 밤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빵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먹을 게 아니고 선물할 거니까, 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던가. 나는 다른 사람의 욕망을 대신 구하러 온 사람처럼, 작은 빵에 붙은 특별한 이름에 초연한 듯 굴었다.


오래 기다린 이름의 귀퉁이 깨끗이 비우고 나서도, 봉투를 버릴 수 없었다. 그건 천오백 원짜리 편의점 빵이 아니라 기다림의 증표니까. 봉투를 깨끗이 씻었다. 이젠 다른 사람의 기회를 뺏지 말자는 다짐을 기억하려고, 봉투를 거꾸로 세워 물기를 말렸다. 바닥이 천장이 되 맺혀있던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떨어진 물방울이 마르는 속도로 밤이 지나갔다.

꿈에, 나는 포켓몬 빵이 가득 든 트럭을 몰았다. 꿈속에서도, 1종 면허를 따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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