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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Jul 31. 2022

룸메이트의 미덕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자고, 크고 작은 슈트 케이스 두 개를 끌고 오느라 지친 얼굴로 도착한 방은 널찍해서 휑해 보였다. 학도시의 절반을 차지 기숙사는 학교에서 지은 게 아니라 개인이 본인 집을 임대 경우가 대부분이,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그 집의 가장 큰 방을 차지하게 된 건 행운이었다. 룸메이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게 행운에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긴 했지만.


문을 열자마자 보인 풍경에서 아기자기하거나 쾌활한 취향은 전혀 보이지 않다. 신경써서 꼭 필요한 것만 남긴 건지, 공간을 꾸미는 데 관심이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방이었다. 방만큼 룸메이트의 인사도 모호다. 희미하게 입가에 올랐던 미소 잘못 봤나 싶을 만큼 순식간에 사라졌고, 환영한다는 말을 하는 목소리에 고저장단이 없었다. 냉한 성격인지 담담한 성정인지 알아채기 힘들었다. 등을 돌려 자리로 가는 걸 보니 창문 바로 옆 침대가 그녀 것인 모양이었다. 반대쪽 끝에 놓인 침대 쪽으로 나도 걸어갔다.


말이 없는 편이야. 우리도 얼굴 자주 못 봐.

가끔 살아는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


기숙사를 안내해 준 선배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내 룸메이트는 기숙사의 누구와도 말을 안 했고, 밥때가 되어도 주방에 내려가 요리를 하지 않았다. 이제 막 도시에 도착한 사람들과 오래 머문 사람들 사이에서 간단한 걸 만들어 먹고 방 돌아와 보면 빈 컵라면 용기가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건강이 염려되는 식단이었지만 그녀-후유꼬-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누구보다 붉고 통통한 뺨을 가지고 있어서 도저히, 영양 결핍으로 쓰러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밖에서 오대 영양소가 고루 포함된 밥을 사 먹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뺨이었다. 나도 서랍에 비상식량으로 손가락 두 개 크기의 크림빵을 보관해 두고 후유꼬가 없을 때만 먹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먹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유일한 룸메이트인 셈이었다.


말은 없어도 후유꼬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후유꼬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다음부터였다. 그날 이후로 문 앞에서 망설이는 기척이 느껴다. 노크를 하기도 했고, 벌컥 지 않고 끼이익- 경첩 미끄러지는 소리를 천천히 낸 다음 문을 열기도 했다.


아무 때나 들어와도 상관없다고 말하니 그럼 너도 아무 때나 들어와,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후유꼬 망설 문을  부터 나도 문 앞에서 자주 머뭇거리고 부스럭다 들어온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선명한 원색의 수영복을 입고 뜨거운 해변을 뛰어가는 사람들, 웃통을 벗고 농구를 하거나 보드를 타는 청년의 이미지. 그런 심상으로 캘리포니아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일월의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을 때 분명 놀랄 것이다. 아무리 신선한 햇살이 무제한 제공되는 땅이라 해도 겨울이 제 존재를 증명하듯 싸늘한 입김을 뿜기 시작하면 막 고개 내민 햇살도 창백하게 질리니까. 얇은 파자마에 얇은 이불이 문제였을까. 한 조각의 바람도 들어오지 않게 발과 팔을 숨기고 이불을 말아 애벌레처럼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당긴 다음 잠들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목이 잠긴 애벌레가 되고 마는 일월이었다.


그럴 때 이불 밖으로 고개만 살짝 들어 실눈으로 후유꼬 쪽을 보면 창문이 열려 있었다. 꽉 닫은 것도 아니고 활짝 열린 것도 아니어서 열렸다고도, 닫혔다고도 말할 수 있는 상태였다. 너는 추운지 몰라도 나는 더우니 이만큼만 열게, 그렇게 말하는 말투 같았다. 건강한 혈색이긴 지만 쌀을 먹는 걸 본 적 없는 룸메이트의 건강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창문에 대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을 열고 싶은 사람과 닫고 싶은 사람이 한 공간에 있을 때, 열고 싶은 사람의 의사를 존중하자는 문장이 적힌 표지판을 다른 도시에서 본 건 그보다 한참 후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문장이다. 문을 열고 싶은 사람은 심리적, 신체적 이유로 닫힌 문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일 테니까. 그 방에서 열린 창문을 견딜 수 없는 이유는 새벽에 조금 춥다는 것뿐이었으니까.


후유꼬 방에 머무는 시간 길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방에 있을 땐 책을 읽거나 과제를 했고, 혼자 있을 땐 소리가 크게 나는 일을 했다. 내 경우엔 그게 통화였다. 언제 시작하든 후유꼬가 돌아오면 통화는 끝났다. 나는 통화 상대가 나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고, 건강해지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시간 날 때마다 통화를 한 덕에 그가 가르치는 학생의 수면 패턴과 실력이 도통 안 느는 과목 알게 됐다. 헬스장에 열심히 다닌다는 이유로 아버지한테 자기 자신만 아는 놈이 말을 들었 얘기를 들었을 땐 내가 직접 그 말을 들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마음 아픈 사람 옆에 있을 수 없어서 아픈 마음에 무게가 생겼다.


공항에서 헤어지는 동안 참았던 눈물이 비행기에서 쏟아질 때 다른 것도 같이 쏟아진 게 틀림없었다. 말이 없고 자리를 자주 비워서 불편하지 않은 룸메이트도, 각기 다른 대륙에서 온 기숙사 친구들과 기름진 미국 음식도 눈물 빠져나간 자리에 생긴 구멍을 채우지 못했다.


구멍에 꼭 맞는 모양이 아니면 임시방편으로 막아도 상처를  수 있다. 해야 상처를 안 낸다. 사물 중 가장 순한 건 인형일 것이다. 인형이 하나 있면, 그를 안는 것처럼 인형을 안을 수 있겠지. 쌀쌀맞은 타국의 겨울도 견딜 만하겠지. 인형은 그가 한국에서 보내 준 인형이어야 했다. 한 사람과 시절을 대신하는 거니까. 그의 만 한 인형이면 좋겠지만 국제 우편으로 소포를 부치는 일의 번거로움과 비용을 생각하 솔직히 말 수 없었다.


인형 하나만 보내 줘. 크기는 상관없어.


너 대신 품에 안을 인형이야, 라는 말은 생략했다. 이곳이 생각보다 추워서 이불 말고도 마음 데울 게 필요하단 말도.


얼마 안 가 특급 배송으로 소포가 도착했다. A4 크기의 우체국 박스였는데, 먼 길 오는 동안 해지거나 찢길까 봐 테이프꽁꽁 싸모양이 꼭 구명조끼로 단단히 여민 등 같았다.


안에는 에어캡으로 감싼 뭉치 하나와 편지, 잘게 자른 파스텔 톤의 종이가 가득 들어있었다. 뽁뽁이를 벗기니, 손바닥에 올려놓 적당한 사이즈의 깜찍한 인형이 하나 나왔다. 껴안고 자다간  밑에 깔릴까 봐 걱정되는 크기였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을 때, 결과가 의도와 얼마나 동떨어질 수 있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도 인형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첫인상의 실망감이 애틋함으로 바뀌었다. 크기는 상관없다고 했으니 책상 위에 올려놓거나 주머니에 넣고 다닐 걸 생각했을지 모른다. 인형을 사 본 적 없고, 껴안고 자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첫 번째 인형이었을지도 모르고.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인형 더미 앞에 오래 서서, 거기서 가장 앙증맞은 걸 골랐을지도 모른다. 완충재로 인형의 몸통을 감싸고 연보라색 습자지로 상자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내내 나를 생각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하니 정말 크기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끌어안고 자는 건 창틈으로 조용히 입장 밤바람이면 족할지 모른다. 그가 보내준 음악이나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편지로 밤을 데울 수 있을지도 모.


나는 어릴 때 꿈의 입구까지 데려가던 내 체구만 한 곰 인형 다음으로 그 인형을 오래 데리고 살았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학업이나 때문에 이사를 할 때 가방에 따로 인형을 챙겨 가서 제일 먼저 새 방을 보여줬다.


인형을 만지면, 사람사람껴안을 때 더 외로워진다는 시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심장이 반대쪽에 있기 때문에 포옹을 하는 두 사람의 심장은 영원히 닿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시를 떠올릴 때면 시를 보고 동생이 했던 말도 기억의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뒤에서 안으면 되잖아, 그럼 심장이 같은 위치에 있어서 포개질 텐데.


주먹만 한 인형을 품에 꼭 안고, 다른 사람의 손바닥이 가슴에 닿을 때처럼 닿은 부분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때, 외출했던 후유꼬가 돌아왔다. 할 말을 머릿속으로 고르던 얼굴이 인형을 흘끗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야?


곧 만나,

그게 이름이야.


후유꼬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다 멈칫했다. 누가 보낸 건지 묻지 않았는데, 묻지 않아도 알겠 눈빛이었다.


추우면 문 닫아 줄게. 밤에 자다 추우면 말해.


그 방에 도착하고 들은 목소리 중 가장 다정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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