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극복하지 못한 이야기
수능이 끝나고 입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자 처음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10kg을 감량해서 65kg가 되었다. 아직 앞자리 5는 보지 못했지만 바지 사이즈도 많이 줄어들고 얼굴에도 눈에 띄게 변화가 생겼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조금은 괜찮아보여서 옷도 한벌씩 사보고 화장도 연습해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앞자리 5를 볼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다시 혹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하지만 아직 음식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절식-폭식을 반복하다보니 살은 더이상 빠지지 않았다. 65kg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다.
그러다가 2023년에 우울증이 찾아왔다 (사실은 조울증이지만). 일상이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축축 처졌다.
PT를 등록해서 다이어트에만 집중하다보면 무기력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이번 겨울방학동안 다이어트를 성공하고 몇년동안 이어져온 살과의 지지부진한 싸움을 끝내자는 결심을 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이 결정이 내 안의 강박 스위치를 제대로 눌러서 엄청난 폭식증을 불러올거라는걸...
PT 트레이너는 나에게 세끼 다이어트식을 먹으라고 했다. 식단은 고구마 1개, 방울토마토, 계란, 야채가 끝이었다. 매일 하루치 식단과 아침 몸무게를 찍어서 보내라고 했다. 처음 일주일은 정말로 완벽하게 지켰다.
일체의 군것질도 하지 않았고, 트레이너가 정해준 식단을 그대로 따랐다.
군것질이 너무 먹고싶을때는 일단 다 사놓고 바구니에 야금야금 모았다. 이렇게 모은 간식들은 어쩌다 한번씩만 꺼내서 조금씩 나눠서 먹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하면 앞자리가 바뀌는데 절대로 간식을 먹을수는 없었다. 그렇게 간식 바구니는 가득 차게 되었다.
헬스장이 걸어서 30분 거리였음에도 매일같이 가서 운동을 했다. 살은 쭉쭉 빠졌다. 나는 결국 한달만에 60.4kg을 보게 되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꽉 끼던 바지가 헐렁해졌다. 조금만 더 하면 앞자리가 바뀔거라는 생각에 더 혹독하게 나 자신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체중계는 절대로 59.9kg라는 숫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60.4kg라는 숫자를 보고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나는 서서히 미쳐가기 시작했다. 점점 음식을 참기가 어려워졌다. 도저히 군것질을 참을수가 없어서 그동안 먹던 고구마, 계란, 방울토마토 대신 간식바구니의 과자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다. 물론 칼로리 계산을 해서 몇 개 먹을지 미리 정해두고서 하루에 4-5봉지의 군것질로 모든 식사를 해결했다.
그러던 어느날, 폭식이 제대로 터졌다. 그날은 이른 아침부터 군것질로 하루치 칼로리를 다 채워서 더 이상 먹으면 안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과자로 향하는 손을 멈출수가 없어서 과자 한봉지를 더 먹었다. 그리고 나서 미친듯한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간식바구니의 과자들을 폭식하기 시작했다.
멈춰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멈출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바구니에 가득했던 군것질을 전부 먹어치웠다. 물려서 토할 것 같았지만, 이 바구니를 끝장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울면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하루종일 폭식하기 시작했다. 미친듯이 불안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것, 생각나는 모든것을 먹어야만 했다. 그래도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음식 생각만 하고 먹을 생각만 했다. 도저히 멈출수가 없었다. 몸무게를 재기 무서워서 계속 미루다가 폭식이 터진지 2주만에 체중계에 올라갔다. 67kg가 되었다. 어떻게 뺀 살인데 2주만에 돌아오다니, 너무 허무하고 죽고 싶었다.
방학이 끝날때까지 한달 넘게 매일 같이 폭식을 하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처음으로 정신과를 방문했다.
폭식이 안멈춰서 힘들다는 내 얘기에 의사 선생님은 식욕 감퇴 부작용이 있는 항우울제인 '폭세틴'을 처방했다. 약을 먹으니까 신기하게도 식욕이 전혀 안들었다. 그렇게 빨리 약효가 생길리는 없으니 플라시보 효과였겠지만 그래도 음식 생각에서 벗어나니 살 것 같았다. 먹던 양이 확 줄으니 살도 다시 빠졌다.
61kg이 되었다. 약 덕분에 살이 빠지자 스멀스멀 다시 다이어트 강박이 올라왔다. 먹는 양을 의식하게 되었다. 식욕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했다. 식욕이 다시 돌아올까봐 불안했다.
폭세틴이 주는 식욕 감소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고, 결국 나는 몇달만에 다시 원래의 식사량으로 돌아왔다.
그치만 그때쯤 되니 우울이 너무 심해져서 예전과 같이 혹독한 다이어트를 시도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몇개월을 보냈다. 음식은 참지 않고 먹지만 항상 먹고 나면 죄책감이 들었다. 항상 '다이어트 해야하는데.. 어떡하지 이렇게 먹으면 살찔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다이어트를 할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이런 애매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폭식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또 매일같이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넣으며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다이어트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죄책감만 느낄거라면 그냥 포기해버리자. 어차피 지금은 절대 다이어트 못한다. 그냥 먹고싶은거 다 먹어버리자
그리고 나서 고삐를 풀고 정말 미친듯이 먹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모든것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죄책감 갖지 않았다. '아주 어디까지 가나 보자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먹어댔다.
그렇게 2주를 보냈을까? 신기한 변화가 생겼다.
마구 먹어대다가도 물리면 남기기 시작했다. 음식을 남겨도 불안하지 않았다. 이건 내 인생에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내 뇌가 음식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음식에 대한 집착이 줄었다. 초반에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아도 한번 눈에 띄면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어서 무조건 먹었다면, 점점 정말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면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먹고 싶은 음식만 적당히 먹고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체중은 다시 75kg가 되었다. 그리고 쭉 75kg를 유지중이다. 처음에는 75kg까지 계속계속 올라가는 체중에 무서웠지만 75kg를 찍고 나서 계속 유지중인걸 보면 이 몸무게가 내 적정 몸무게인가보다.
보는 사람들마다 왜이렇게 살이 쪘냐고 한다. 부모님도 살 좀 빼라고 한다. 헐렁하던 바지가 꽉 낀다. 그때마다 서럽고 울컥하지만 그렇다고 뭐 어쩌겠는가, 내가 지금 당장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
내 상태를 인정하니 '살 빼고 옷 사야지'하던 생각도 없어져서 3XL 청바지를 주문했다. 더이상 뚱뚱하다고 후줄근하게 나를 방치하고 싶지 않다. 지금 하고 싶은거 다 해버릴거다.
아직 다이어트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했다.
그저 음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때까지, 다이어트때문에 너무 오랜시간 고통받은 내 뇌가 다시 회복될때까지 다이어트를 잠시 미뤘다고 생각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