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5)

by 김소희

저예요, 막내딸. 이번에 고향에 올라갔는데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고 어머니와 여행을 다녀왔죠. 아버지는 항상 바쁘세요. 그래서 이번 여행으로 집에 있지 않았어도 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겠죠. 아쉬우면서도 다행이었어요. 아버지와 최근 나눈 대화는 위로와 압박이 섞여있거든요. 제가 도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걱정이 된다고 하셨죠. 그건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도전을 모욕하는 말이었어요. 그래도 저는 아무 말하지 못했어요. 그저 인정했어요. 나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지, 하고. 아버지, 저의 도전들이 아버지에겐 진정 가치가 없는 행위였나요. 지금까지 제가 이뤄왔던 것들이, 우울을, 불안을 이겨내면서 얻어낸 것들이 정녕 무가치한 것들이었나요. 일 년 간 쉬겠다는 저에게 마음껏 쓰라며 결혼 자금으로 모아놨던 적금을 허용하셨어요. 동시에 쉴 수 없게 만들었어요. 거절하고만 싶었던 인턴 자리도, 그냥 손 놓고 싶었던 자격증도, 기말고사도, 졸업도 모두 얻어내라고 하셨어요.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다, 때가 있는 법이다. 제가 두려워 피하는 것만 같나요. 네, 저는 두려워요. 몹시 두려워요. 제 기둥은 썩어가고 있어요. 거침없이 뻗어낸 가지가 무거워 앙상한 기둥은 산들바람에도 휘영청 흔들리곤 해요. 그래서 저는 두려워요. 이미 꺾인 줄만 알았는데, 아직까지 버텨내는 저의 나무가 밉고도 두려워요. 아버지, 정말로 제가 해낸 도전들과 저를 찾아가는 시간들은 정말로, 불필요한 것들이었을까요.

오늘은 정신과에 가는 날이었어요. 약이 적절한지 선생님은 제게 3주 뒤에 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어요. 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어요. 선생님께 숨기고 있는 건 없는지, 말하지 못하는 건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대답의 시간이 길어졌어요. 그러겠다고 했어요, 결국. 21일 치 약을 받고 추가로 필요시에 먹을 수 있는 약도 받았어요. 이 약 봉투가 두려웠던 거예요. 제가 모든 알약을 털어 넣을까 봐. 그게 두려웠어요. 한 포에 4알씩, 84알의 알약과 필요시 약으로 처방받은 21개의 알약, 그리고 저번 주에 남은 약 4알이 담긴 한 포, 지금까지 아껴뒀던 알약 10개 남짓. 모두 100알이 넘는 알약이에요. 오늘 같은 날은 한 번에 제 입으로 털어 넣고만 싶어요. 하지만 120알을 먹어본 친구는 병원에서 위세척만 하고 죽지는 못했대요. 아주 오래전에 들은 얘기인데도 저는 꾸역꾸역 200알을 모으기 시작했었죠. 이번에는 어떨까요. 200알을 위해 한 알씩, 혹은 한 포씩 하루를 포기하며 죽음을 위해 도전하게 될까요. 아니면 술에 취하듯 흥청망청 약들을 빨리 소진해 버릴까요. 저는 너무 두려워요. 제가 내일 할 일을, 혹은 당장 다음에 할 일을 예상하지 못하므로 두려워요.


제 행복은 그래요. 하루 중에 잘 챙겨 먹는 한 끼가 있으면 좋겠고, 그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어서 조급함 없이 요리를 시작하고, 맛있게 먹고, 샤워까지 끝마치는 하루를 원해요. 그저 제발 잘 먹고 잘 쉬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어요. 저의 행복은 돈으로 가치를 매기지 못해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돈이 있어야 여유도 있는 법이야. 그런 말들이 제 안으로 들어와 저도 모르는 사이 뿌리를 이룰 때, 아주 무가치해져요. 제 숨들이요. 저는 여유를 원해요. 돈이 물론 필요하겠죠. 그저 잘 챙겨 먹고 잘 쉴 수 있는 최소한의 돈만 벌 수 있어도 저는 아주 행복할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는 불행할까요? 제가 행복해 보이지 않아 불쌍할까요? 아버지, 지금의 저는 방황하는 불쌍한 아이로 보이시나요. 틀렸어요. 저는 죽음을 꿈꾸는 몽상가예요. 비로소 죽었을 때 행복하므로, 삶이 아주 불행한 심지 곧은 썩은 나무예요.

아버지의 삶이 가치 있었기를 바라요.


XX. XX. XX. (월)

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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