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밀도

by 김소희

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끝은 어디인지 함부로 확신하지 못한다. 오늘의 내 구는 앞으로의 어떤 날보다도 가장 헐거운 동그라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를 쌓아감에 흥분을 느끼고 정진하자. 나를 가장 신뢰하되 끊임없이 의심하라. 죽어서도 파헤칠 수 없는 나와의 교류에 두려워말고 탐구하라. 그리고 때가 됐을 때 적절한 기준을 가지고 돌아보라.


성연은 외국 생활을 한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아이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낀 지도 반년이 지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에서의 성연은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의도 없는 무딘 날에 찔려 자기 방어를 하기 바빴다. 괴로운 날들의 연속에 병원을 다니기도, 주변인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나날이었다. 이곳에 오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서 가장 기초적인 대화로 들어갔다. 성연은 자신이 바보 같다는 기분에 속상하면서도 이상하게 자유로웠다. 어릴 때 기초를 쌓아가며 정진하던 시절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20대 후반이 되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썩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까, 성연은 생각했다. 동시에 흥분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도 이곳의 사람들은 성연을 있는 그대로 판단한다. 낯선 외국인을 과거의 어떤 잣대나 사회적 잣대를 두고 바라보지 않는다. 친해지는 사람에게 성연의 일부분을 떼어서 보여주기가 쉽지 않아 천천히 다가가게 된다. 언어의 한계가 느껴질 때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쉬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아니 드러낼 수 없는 환경이 편안했다. 스스로를 정리하고 내려놓을 시간이 충분했다. 언젠가 이 나라의 언어로 성연의 깨달음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설렘에 벅차기도 했다.


성연이 스스로와 친하기 전, 그리고 친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성연을 이루던 것들이 층을 이루기보다는 제멋대로의 각도로 얼기설기 세워져 있었다. 성연은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야망, 우울, 행위. 거짓말에 능하지 못한 성연은 도저히 모든 걸 숨길 수 없어 가장 외벽에 있는 것부터 꺼내놓았다. 더 이상 성연의 것이 아니도록, 듣는 이에게 책임을 부과했다. 잘 다져지지 못한 속내의 기반이 불안정하자 불가능으로 채우려 했다. 무리한 공부, 무리한 대학 생활, 무리한 인간관계, 무리한 갈망. 의지를 넘어서 의존으로 연명했고 자극에 중독되어 두려워했다. 위태로운 실이 기어코 끊어질 때 성연은 죽을 듯이 아파했다. 겨우 한 두 개가 떠나갈 뿐인데 성연 자신을 채우던 모든 게 없어진 기분이었다. 단단한 층 없이 모든 게 공허한 성연의 막대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성연이 무섭고 안쓰러웠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조립해 드러내야 하는 20대의 현실이 성연에게는 무거웠다. 성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성공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갔다. 자격이 될 만한 것들을 공부하고, 채우고 성연은 어느 누구와 다를 것 없이 노력했다. 그 사이 성연의 속은 썩어갔다. 그래서 성연은 한 번쯤, 딱 한 번쯤은 낯선 곳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곳에 오게 된 계기는 그랬다.


싸게 구한 작은 방에서, 마트를 오가는 한 시간의 길에서, 시내를 나가는 20분의 길에서 성연은 사유했다. 모든 막대들을 치우고 다시 쌓아 올릴 기회였다. 차곡차곡 인과를 밝혀내고 방향을 잘 잡아 쌓은 단단한 구가 마음속에 박혔고 성연의 속에는 여유가 생겼다. 구의 외부에는 아직 미처 정리하지 못한 추상들이 떠다니고, 삐죽 날 서있기도 하지만 예전만큼 많은 걸 세상에 꺼내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아직도 공간은 충분하니까. 공간의 총부피가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될지는 미지수, 전혀 추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심에 결속되지 못한 외부의 부분들은 언젠가 자리를 잡아 단단한 중력으로 구의 일환이 될 수 있다고 성연은 믿었다. 새로운 가시가 생겨도 공간의 선 밖으로, 성연의 심장 밖으로 쉬이 튀어나갈 일이 없다고 믿었다.


모으기 급급했던 지난날이지만 성과율은 적었다. 모은 것들을 어떻게 잘 쌓아서 구의 밀도를 높이는지가 중요했음을 몰랐다. 강력한 사람이 성연은 되기로 결심했다. 오늘보다 내일 더 밀도를 높일 수 있을까. 100% 확신하고 싶지 않았다. 옳은 자리인 줄 알았던 막대를 다시 빼내고 다른 곳에 놔두거나 잠시 대기시켜야 할 수도 있다. 밀도의 그래프는 절대적 우상향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구멍 송송 뚫린 성연만의 세상에 바람을 다 맞는 채로 고립되게 된다. 절대적인 건 없음을 성연은 몇 번이고 깨달았다. 고통을 무릅쓰고서라도 박혀있는 가치관을 재정비할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에서의 밀도 낮은 성연의 상태를 후회하진 않았다. 그저 총량이 그 정도였을 뿐. 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끝은 어디인지 함부로 확신하지 못한다. 오늘의 구는 앞으로의 어떤 날보다도 가장 헐거운 동그라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스스로를 쌓아감에 흥분을 느끼자, 고 성연은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