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북신문 이야기보따리 공모전 당선작
역사의 지층을 넘기다
김종국
예천 박물관은 타임머신이다. 조명이 과거와 현재를 어둠과 빛으로 이어준다. 시대를 따라 전시된 유물을 하나씩 지켜보며 옛사람의 투박한 삶과 문화를 읽는다. 돌의 문명에서 디지털 문명까지 그 과정을 알면 오늘을 이해하고 내일을 예언한다.
옆걸음으로 걷다가 한 곳에 시선이 멈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한 질을 옮겨 놓은 듯, 손잡이가 두툼한 나무판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언제든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한 목판본이다. 시간의 주름이 깊게 새겨진 목판본 하나하나를 손으로 더듬듯 눈길로 훑는다. 저토록 공을 들여 후세에 남기고 싶은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짙은 가람 빛을 띤 나뭇결에 새김칼이 남긴 세밀한 글씨를 본다. 먹과 나무 향이 어우러진 나무에 활자를 새겨 정보를 오래도록 전승했다. 결을 따라 양각으로 새겨진 글자들은 나무라는 물성을 거스르지 않고 붓글씨의 유려함을 그대로 살렸다.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다.
초간 권문해 선생이 저술한 책의 내용을 새긴 목판본은 1812년(순조 12년) 간행이 시작되어 24년 뒤인 1836년(현종 2년) 마무리되었다. 우리나라의 지리, 역사, 인물, 문학 등을 총 망라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했다. 선조의 지혜가 담긴 지적유산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로 보물 878호다.
고려시대에 한자, 두자 깨달음이 바다를 이뤄 중생의 고뇌를 달랜 팔만대장경이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선명한 양각의 선으로 천년을 이어갈 지식의 씨앗을 심은 대동운부군옥 목판본이 있다. 300년 시차의 대장경과 대동운부군옥의 글씨와 목판의 결이 조화를 이루니, 그 속에 담긴 지혜의 뜻이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마음속에는 수많은 질문이 떠오른다. 이 지식 모음집을 만든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목판본에 담긴 이야기는 어떤 알음을 가지고 있을까? 칼끝에서 피어난 글자를 보며 한 편의 서사시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두터운 나무 사전에 새겨진 일련번호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만든 이의 삶을 그려본다.
목판을 새기는 일은 인내의 결정체다. 한 글자라도 잘못 새기면 전체를 버려야 하기에 마음을 비우고 오직 눈앞의 글자에만 집중해야 한다. 목판을 새기는 손길 하나하나에 장인의 숨결이 흐른다. 글자는 단순한 부호가 아니다. 오늘의 사실을 기록해 내일로 전하는 역사의 증거다. 목판마다 지금의 지혜가 다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옛사람의 정신이 담겼다.
내친김에 선생에 대하여 더 알기 위해 종가를 찾아 나섰다. 고택 입구에 솟을대문 대신 울릉도 향나무가 지키고 섰다. 수백 년의 풍상을 겪어온 나무는 종가의 역사와 드나든 사람들을 모두 나이테에 기록했을 것이다.
멀찌감치 서서 종가를 한눈에 담는다. 야트막한 산을 병풍 삼아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은 종가는 예스러운 멋이 그윽하다. 자연의 힘을 이끌어 넉넉함과 평안을 바라는 밑그림도 엿보인다. 주춧돌, 기둥, 난간, 처마, 기와, 용마루, 시간이 빚어낸 고색창연한 모습을 둘러본다. 트고 닳아 나무 특유의 생기는 잃어도 곳곳마다 역사의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때마침 종가를 지키는 분에게 내력을 들었다. 묵향의 외길로 알알이 영근 지혜의 책은 선생이 대구 부사 시절(선조 22/1589년)에 엮어 스무 권 스무 책으로 만들어졌다. 총 3질 중 부제학 김성일이 빌려간 1질이 임란 통에 사라졌다. 다른 1질은 한강 정구선생이 빌려갔는데 집안에 불이 나는 바람에 한순간에 소실되었다. 책 속에 담긴 지혜와 감동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영원히 사라지는 비극을 피하기 위해 현종(12년) 1836년 목판본을 만들었다. 백세토록 이어간다는 뜻을 지닌 3칸짜리 종가 별채인 백승각에 보관했다. 묵직한 나무 책장에서 풍기는 오래된 냄새에 서고의 질감이 더욱 뚜렷하다. 초간 선생의 숨결과 학문의 열정을 고스란히 지켜온 흔적의 자리 백승각, 지금은 안을 모두 비워내고 홀로 자적에 들었다.
시간 여행자가 된 나는 다시 길을 나선다. 선생이 자적한 초간정사(1582년 선조 15년)를 찾아간다. 초간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 천장으로 휘어진 충량이 중도리 위에 편안하게 걸터앉았다. 기와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품은 연회색으로 비바람에 씻겨 은은한 빛을 발한다. 지붕의 능선은 묵직한 붓글씨의 획처럼 힘이 있으면서도 유려하게 이어져 선생의 학식과 기품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내 눈에는 초간 선생 삶의 자화상으로 보인다.
초간정은 금곡천이 휘감고 돈다. 초간정을 떠받치는 암석은 뒤틀리고 구불구불하다. 가만히 보면 마치 책을 쌓아놓은 것 같다. 자연사 도서관이라고나 할까. 자연이 저럴진대, 역사의 물줄기도 저 금곡천처럼 굽이쳐 휘돌고 지각도 융기와 침하를 거듭했을 터이다.
정변으로 내일을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 서슬 퍼런 권력의 칼날이 휘날리던 날, 판을 뒤집으려는 음모는 끊임없이 지속된다. 누가 오늘의 주인공인지, 알 수 없는 날이 이어진다.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면 정치 지형은 뒤틀리고 흔들린다. 욕망이 얽히고설켜 당쟁의 혼란이 격화된다. 그렇게 혼란한 시기에 초간 선생은 권력을 버리고 낙향했다.
초간정을 멀리서 카메라에 담는다. 정치적인 격변으로 흔들리는 지층 위에 마치 초연하게 앉아 책을 저술하는 초간 선생을 닮았다. 정자의 한편에 앉아 먹을 갈고 수많은 생각과 감정으로 얽힌 마음을 다스린다. 붓을 들어 한 획, 한 획 자신의 소신을 써 내리는 모습이 시간 여행자의 눈에 투영된다.
과거는 흔적을 남겨야만 미래가 기억한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수만 자 붓글씨의 무게는 단순한 먹과 붓의 더함이 아니다. 한 필치, 두 필치가 한 장이 되고 한 장이 쌓이고 쌓여 역사의 지층을 이룬다. 나는 지금 한 인간의 고독한 여정이 두껍게 퇴적된 업業 위에 서있다.
자연의 지층 위에 앉은 초간정. 마루에 앉아 역사를 기록한 선지자를 만나고 나오는 길 위에서 생각한다. 자연의 역사力史와 인간의 역사役事가 어우러진 역사歷史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는 되돌아본다, 현재라는 지층 위에 나는 무엇을 남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