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글로벌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창 대신 괭이를 들고
김종국
은퇴로 밥그릇 싸움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이태동 안 주말마다 나를 감싸줄 안식처를 찾았다. 호젓한 언덕길 길섶마다 과거의 향수가 스며드는 그리움의 개울가에 다다랐다. 그곳을 머물 곳으로 정했다. 순간순간 나의 마음을 적셔주는, 잊었던 기억들이 흐르는 자리였다.
안뜰과 세상의 큰길 사이에는 지난 추억의 숨결을 품은 개울물이 조용히 흐른다. 그 곁에는 논이랑이 서로 길게 이어지며 자연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개울 건너 오랜 시간 사람손이 닿지 않아 거친 야생의 숨결이 짙게 배인 작은 자투리땅을 마련했다. 마치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키 큰 덤불이 앞을 가로막는다.
손으로 뽑을 때 질기게 저항하던 잡초들이 쟁기질 한 번에 바람처럼 흩어진다. 오래 박혀있던 조각난 나무뿌리와 돌을 하나하나 들어내며 이 땅의 지난 시간을 더듬었다. 매일 날이 저물 무렵이면 온몸이 흙먼지로 뒤덮이고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일구어진 땅 한 평 한 평은 나의 거친 숨결과 땀이 스며든 생명의 무대가 된다.
그늘에 남은 하얀 잔설이 햇살에 반짝이며 녹아내린다. 땅속에서 따스한 초록색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며 꿈틀거린다. 땅속 벌레들도 봄의 생동감을 느끼고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꼼지락거리는 나무뿌리들이 기지개를 켜며 생명의 시작을 알린다. 조금 더 깊은 땅속에는 녹지 못한 차가운 기운이 엉켜 있지만, 따스한 햇살에 곧 부드러워진다.
창 대신 괭이를 손에 들고 흙을 파헤친다. 봄 냄새 맡은 곡괭이는 거침없다. 봄기운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땅속을 이리저리 뒤집어 이랑을 만든다. 비닐을 씌우고 씨앗을 뿌린다. 씨앗들이 저마다 새싹이 되어 초록의 노래를 합창한다. 매일 얼마나 자랐는지 서로 크기를 내세우며 뽐을 낸다. 그 푸름이 눈부시다. 흙내가 깊이 배어있는 손으로 앞으로 살아갈 숨찬 시간을 격려해 준다.
밭을 개간한다는 것은 단순히 땅을 여는 일이 아니었다. 비록 손바닥만 한 텃밭이지만, 생명을 보살피는 일은 여느 큰 농사와도 다를 바 없다. 땅을 갈아엎어 뿌린 씨앗이 새싹으로 피어나는 생명력은,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고추 모종을 심는 순간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밑거름을 주고, 방아다리 아래에 달린 잎과 작고 연약한 고추들을 하나하나 따내야 한다. 과일나무 가지 치는 일도 버겁다. 열매가 어떤 색깔로 곱게 물들지 고민하며 잘라야 한다. 서툰 솜씨에도 땅은 묵묵히 작물을 키워준다. 고된 일 속에서도, 땅과의 교감에서 나는 자연의 이치를 배운다.
작물은 벌레들이 한사코 찾아 나서야 하는 소중한 먹거리다. 모종을 심는 순간부터 쉼 없이 쳐들어온다. 모종을 심고 비료만 주면 알아서 잘 자랄 것 같은 착각은 해충 앞에서 무참히 깨진다. 햇빛은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없지만 잘 자라게 보살필 자신은 있다. 하지만 끝내 싸움을 중재하는 해결사는 되지 못한다.
다른 선택을 고민해 본다. 고추나무 사이에 파를 심으면 고추와 파가 서로의 성장을 돕는다. 콩과 무를 나란히 심으면 나방 애벌레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이처럼 서로를 살피고 돕는 관계는 마치 생명의 연대기처럼 자연의 섭리를 드러낸다. 하지만 공생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들의 힘만으로는 집요한 해충의 위협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이제는 해충과의 전쟁이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벌레들과 그들을 무너뜨리려는 농약 간의 치열한 대결이 펼쳐진다. 내성이 강해질수록 전투는 점점 더 격렬해진다. 면역력이라는 유전자의 흐름 속에 새겨진 저항력은 마치 세대를 이어가는 전설처럼, 후손에게 전해진다. 생명의 끈질긴 의지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진화의 서사를 만들어간다.
상추를 뜯어먹던 싸리수염진딧물과 꽃 노랑 총채벌레도 다 사라졌다. 돌 틈 사이 끈질긴 모습의 풀들도 봄이 올 때까지 긴 휴전이 시작됐다. 손바닥 농장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승자는 누구인가. 벌레와 섬세한 물결무늬의 깻잎이나 고추와 오이가 입이 있다면 쏟아지는 농약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먹거리를 만드는 일은 하늘의 이치와 농부의 땀이 조화를 이룰 때 그 뜻을 이룬다. 생태계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농약을 뿌리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다듬어짐으로써 지나간 역사와 오늘의 삶이 공생하고 있다. 여름 내내 나의 애간장을 태웠던 잡초와 벌레들도 이제 겨울을 나는 준비에 들어간다.
파종은 씨를 뿌리는 시작이고 추수는 열매를 거두는 마무리다. 시작과 마무리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로 이어지는 순환이다. 추수가 한 해 농사의 끝이나 소멸이 아니고 다음 해 봄의 파종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다. 파종과 추수, 성공과 실패, 이 거대한 순환 속에서 나 또한 생명을 유지한다.
자연은 스스로 정교한 생태계를 이룬다. 이 작은 벌레들과의 전쟁 속에서 잃어버린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되찾기 위해 그들과의 공존을 꿈꾼다. 푸르른 들판에서 나는 오늘도 생명의 노래를 듣는다. 그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과 조화가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한 자연의 물음 속에서 알음을 찾는다.
인근 농업기술센터를 찾았다. 생태 농법에 대해 배우고, 해충과의 공존을 모색한다. 농작물과 해충은 서로 다른 존재지만,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다양한 생명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인류가 생태계의 초상위에 있지만 벌레와의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텃밭 주위를 돌아본다.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해충과의 전쟁이 주는 피로감 속에서도 자연 속에 사는 재미를 찾는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 각기 다른 색깔로 물들고 다른 냄새를 풍긴다. 평화로움, 숲과 나무, 바람, 햇빛, 새소리를 온몸으로 느낀다.
가을이 깊어지니 뜨거웠던 여름이 정겨운 온도로 낮아졌다. 길도 들도 조용하게 펼쳐져 있고 나무들도 산속에 조용히 숨었다. 가을바람이 스치는 대로 배춧잎이며 늙은 고춧대들이 갸우뚱거린다. 밤이 되니 하늘엔 흰 가루 뿌린 듯 희뿌연 잔별들이 수두룩하다. 밤이 깊어가고, 별들이 반짝인다.
천문학자가 별을 통해 우주와 신의 뜻을 알아간다면 농부는 농사를 지으며 자연의 뜻을 배운다. 농부는 들판의 바람과 햇살 속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고민한다.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싹 틔울 꿈을 그린다. 자연은 선문답 없이 진실을 깨우쳐준다. 그 속에서 해답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