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도 소녀였다
박경화
밤늦게까지 작성한 글을 불러내니 없다. 저장할 때 클릭을 잘못해서 사라진 글은 어디에도 없다. 띄엄띄엄 떠오르는 기억에만 존재한다. 지나간 일도 사라진 글처럼 흔적이 없다. 떠오르는 추억 속에서만 불투명하게 남아있다. 인정사정없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은 소녀를 아가씨로, 아줌마를 어르신으로 변화시킨다. 지나간 순간이 언뜻 떠오를 때가 있다. 시간의 필터로 걸러진 그 장면은 파스텔 톤으로 다가온다. 어떤 장소는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버튼역할을 한다. 가영에게는 신촌이 그런 장소다.
연세대 알렌관으로 가기 위해 2호선 신촌역에서 내렸다. 친구 딸 결혼식에 맞추어 넉넉하게 시간을 갖고 걸어가고 싶었다. 봄날 주말의 오후, 대학 가는 젊은이들로 활기찼다. 맛집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길거리공연도 펼쳐졌다. 변해버린 상점들 사이에서 ‘독수리다방’의 간판 글자가 눈에 띄었다.
대학 1학년 때 미팅을 끝내고 신촌 길을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학원 다니지 않았나요?”
재수학원에 다닌 적이 없으니까 아니라고 했다. 키가 크고 가방을 든 남자는 가영에게 같은 학원을 다녔던 누군가와 닮았다며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했다. 이성에게 접근하기 위한 상투적 멘트 같았다. 좀 전의 미팅파트너가 무례해서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제의를 받아들였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재수해서 지방의대에 합격했는데 서울의 의대를 가기 위해 삼수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이를 따지면 가영보다 두 살은 많을 것 같았다. 그는 며칠 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두 번째 만남은 망설이다가 나갔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 정장을 입고 나왔다. 가영은 흰 티셔츠에 곤색 주름치마를 입고 빨간 가디건을 걸쳤다. 그의 학원이 끝난 시간에 만났고 날은 어둑해져가고 있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팔랐다. 책과 노트를 팔에 낀 채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니 힘들었다. 그는 가영을 어린 동생 대하듯 독려하며 길을 이끌었다. 정상부근에 오르니 붉고 둥근달이 환했다. 그는 가영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어색했지만 몸도 마음도 나긋해지는 봄밤이었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가영은 숏커트 머리였지만 ‘긴 머리 소녀’를 불렀다.
그는 노트를 달라고 하더니 만년필로 속지 첫 페이지에 세로로 시를 적었다.
세 번째 만남은 두려웠다. 대학생이라고 사칭한 것도 아니고 삼수생이라고 밝혔으니 거짓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계속 만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약속장소에 안 나갔다. 그가 기다리다가 어떤 표정으로 돌아섰을지. 며칠 후 학교 과사무실 앞 편지함으로 편지가 왔다. 봉투 안에 든 편지지의 첫 문장은 ‘약속장소에 못 나가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이어서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그가 약속장소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갔을지 아예 안 나왔을지는 미지수였다.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백양로를 따라 걷다 치과대학 뒤편의 알렌관으로 갔다. 야외결혼식장은 보랏빛과 하얀색 꽃들로 단장되었다. 한복을 입은 신부엄마인 친구의 모습이 고왔다. 친구 딸은 언덕 위의 동화 같은 집에서 나와 입장을 했다. 사람은 처음 만난 모습이 영원히 기억에 새겨져 있는 걸까? 눈가에 주름이 진 친구가 그녀의 서른 살 넘은 딸보다 어려 보이는 건 무슨 착시 현상인가, 친구의 대학교 때 앳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친구 남편은 오랫동안 의사생활을 했다. 주례는 남편의 친구라는 의대교수가 맡았다. 축복의 말을 들으며 예전에 길에서 만났던 삼수생이 떠올랐다. 그는 의사가 됐을까?
피로연 원탁에는 동창들이 둘러앉았다. 지금도 연락이 가능해서 만남이 유지되는 친구들이다. 꾸준히 만나서인지 모습이 어색하진 않았다. 나이 들면 외모의 평준화라고 했던가. 대학 때 빼어나게 눈길을 끌었던 친구들도 흰머리와 주름이 늘어나 빛을 잃었다. 친구들은 주로 어디가 아프다는 말과 손주이야기들을 했다. 가영은 딸이 결혼한 상태지만 아직 손주가 없어서인지 대화가 크게 실감 나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져 신촌역을 향해 갔다. 밤거리를 혼자 걷고 싶었다. 기억들이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툭툭 튀어나왔다. 오래전 신촌에서 말을 걸어왔던 사람이 시를 써준 노트와 두통의 편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문구는 마음속에 남아있다.
‘조그맣게 귀여운 아가씨야. 보다 더 추구하고 보다 더 사랑하라.
행복의 의미를 찾으려 진리의 횃불을 밝히려 파란 마음과 함께 몸을 사르소서’
어르신도 소녀였다. 나이 들어가며 위축될 때도 있지만 호기심을 지니고 다양한 것을 배우며 더 나아지려고 한다. 오래전 용기를 준 문구가 가영의 마음 한 구석에서 희망의 씨앗이 된 것은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