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결혼이주여성의 자아를 찾아서
베트남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옅은 주황빛 햇살이 창문으로 밀려왔다. 햇살은 무대 위를 비치는 조명처럼 조금씩 방향을 달리하며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한국어 배우기 책에 초점을 맞추다가 조금 지나 라잉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라잉은 좀 더 자고 싶었지만 햇살의 눈 맞춤과 덜그럭 덜그럭거리며 무언가를 옮기는 소리, 불규칙한 소리와 진동을 만들며 공회전하고 있는 아버지의 오토바이 엔진 소리에 잠을 더 청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나갔다.
“라잉 일어났니”
실눈을 뜨고 서있는 나를 엄마가 웃으며 반겼다.
“오늘은 왜 이리 분주해요?”
“오늘 벼 수확할 거야”
“벌써 벼 수확할 때가 됐어요”
“벌써라니 벌써 모 심은지 3개월이 됐는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엄마의 표정에서 잔잔한 미소가 있었고, 활기찬 몸놀림을 보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벼농사가 생계의 전부인 부모님에게 오늘은 기쁜 날이 틀림없지만 수확할 때는 평상시에 비해 노동의 강도도 높았기 때문에 라잉은 무표정한 얼굴로 부모님을 바라봤다. 그리고 허리 한번 펼 틈도 없이 일할 부모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른거려 마음이 무거웠다.
익숙한 냄새가 살랑살랑 라잉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여동생이 쌀국수를 먹고 있었다.
“언니 일찍 일어났네.. 이리 와 같이 아침 먹어”
라잉을 본 첫째 동생 아잉이 환하게 웃으며 국수냄비에 국자를 넣었다.
동생들의 교복을 입은 모습과 활기찬 모습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알 수 없는 설움이 올라왔다.
라잉도 5년 전에는 동생들처럼 꿈 많은 학생의 모습이었다. 졸업 후 하노이에 있는 간호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포기를 했다. 아니 포기라기보다는 잠시 보류를 했다. 두 동생이 졸업할 때까지는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부는 잘하고 있니?”
그릇에 입을 대고 쌀국수를 밀어 넣는 아잉에게 말을 건넸다.
“공부는 잘 되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가고 싶어”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는 동생의 말에 라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척 쌀국수를 젓가락으로 가득 집에 입에 넣었다.
‘꼭 갈 수 있어, 꼭 가야 해, 학비는 내가 벌어줄게’라고 입 밖으로 자기도 모르게 나오려는 말을 막기 위해서였다. 현실을 외면한 희망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자신의 희망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이런 말 해서. 부모님한테는 걱정할까 봐 말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언니한테는 말하고 싶었어. 그냥 하소연하고 싶어서. 신경 쓰지 마”
“괜찮아, 잘했어! 일단 열심히 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겠지. 나도 방법을 찾아볼게”
눈에 힘을 주어 동생의 눈을 바라봤다. 눈 맞춤으로도 격려해 주고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정체된 도로에서 느끼는 듯한 답답함이 가슴을 꽉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국수를 먹고 있지만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빈 속만 채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왠지 아침부터 기운이 빠지고 우울해졌다. 매일 느끼는 생각이고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심해진 것 같았다.
부모님이 개미처럼 쉴 새 없이 열심히 일을 하지만 원하는 만큼의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 라잉의 마음속에 먹구름이 드리우게 했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이 된다는 자기만의 꿈이 확실한 동생이었다. 라잉은 자기는 대학을 가지 못하더라고 동생은 꼭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는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고 암담했다. 아침 햇살이 예쁘고 밝게 내려앉고 있었지만 암담한 현실을 밝혀주지는 못했다.
“그릇은 내가 치울게.. 너희들은 학교에 가”
손을 분주히 움직여 빈 그릇을 모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거리를 날려버리려고 했다.
“언니 학교 다녀올게.. 언니도 수고해”
환하게 웃는 동생들이 손을 흔들며 집을 나섰다.
라잉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 동생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동생들에게 튼튼한 버팀목이 되리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라잉은 다낭시에 속한 호아방이라는 농촌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농사 일손이 부족할 때 도울 때도 있었지만 거의 매일 다낭 마사지 샵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마사지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마사지는 따로 배우지 않고 옆사람이 하는 걸 따라 하다가 요령을 알게 되었다. 마사지 샵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가끔 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볼 때면 너무나 부러웠고 돈을 벌어 꼭 대학을 가야겠다고 자기 자신과 굳은 약속을 했다.
마사지 일이 없는 시간에는 함께 일하는 또래의 직원들과 고객들의 몸도 품평하고 팁은 얼마 받았는지 이야기를 하며 스트레스도 풀고 피로도 풀었다.
그들과의 대화 중에는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으로 가서 살고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있진 않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이곳보다는 더 낫게 살고 있다고 했다.
라잉도 한국 사람과 결혼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베트남에 있을 때는 서로의 형편과 처지가 비슷했는데 한국에 가서 잘 살고 있는 친구가 어쩔 땐 부러워했다. 그럴 때면 한국사람과 결혼해서 한국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가면 부모님의 무거운 삶의 짐도 조금 덜어 드리고 동생도 대학에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한국에 가면 한국어 공부할 때 조금씩 봤던 한국 드라마도 마음껏 보고 K-POP도 맘껏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상상을 하니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어졌다. 잠시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라잉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멍하니 있는 나를 보며 가장 친한 동료인 로안이 물었다.
“응? 아냐”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 혼자 배실 배실 웃게”
“아니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으로 간 친구가 생각났어”
“너도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글쎄... 좋은 사람만 있다면...”
라잉은 많은 생각이 떠올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나마 한국생활에 대한 상상으로 행복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장밋빛 희망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작은 소리가 새어 나오는 듯했다.
흐엉은 오늘도 다낭에 있는 마사지 샵에 출근을 했다. 그곳에서 청소를 하고 고객들의 소지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는 직원들이 한국 관광객들에게 팁으로 받은 1,000원짜리를 모아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 한국사람들을 찾아갔다.
“1,000원 10장 만원 1장” 어눌한 발음과 손짓을 섞어가며 한국에서 온 관광객에게 말을 걸었다. “왜 바꾸려는 거예요?” 질문에는 한국말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그냥 미소만 짓다가 1,000원짜리를 세어 보여주며 “1,000원 10장, 만원 1장”이라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흐엉의 미소와 좋은 인상에 바꿔주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럴 때마다 흐엉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다. 마사지샵 직원들이 팁으로 받은 1,000원짜리 지폐를 베트남 돈으로 환전을 해야 하는데 인근 은행에서는 최소 환전 금액이 10,000원이기 때문에 마사지를 끝내고 쉬고 있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지폐 교환을 요구했다. 지폐 교환이 되면 은행에 가서 베트남돈으로 환전을 하고 환전을 부탁한 직원들에게 10% 수수료를 받았다.
1,000원짜리 교환을 맡기는 사람 중에는 여성 아르바이트 마사지사가 대부분이었다. 그중에는 라잉도 있었다. 라잉과는 고등학교 3년을 함께 다녔다. 얌전하면서도 때로는 당찬 모습에 그녀를 마음속으로만 사모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어 배우기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흐엉은 고등학교 졸업 후 경찰학교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발목을 잡았다. 라잉처럼 돈을 벌어 경찰학교를 가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마음속으로 경찰이 된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는 라잉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림의 배경은 항상 장밋빛이었다.
마사지를 끝내고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라잉이 오고 있었다. 하늘색 반바지에 검은색 샌들을 신고 흰색 티셔츠를 입은 라잉의 모습이 한낮의 햇살과 어울려 빛이 났고 그 빛이 흐엉의 마음속까지 환하게 비치는 것 같았다.
“요 앞 공원으로 드라이브 같이 가지 않을래?”
입이 귀에 걸린 듯한 환한 표정의 흐엉이 말했다.
“좋아”한마디 말과 동시에 라잉의 몸은 오토바이 뒷자리에 실려있었다.
흐엉의 허리를 팔로 꼭 껴안았다. 어릴 적 엄마품의 포근함과는 달리 뭔가 듬직하면서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마주치는 바람이 허리를 타고 머리칼을 날리며 얼굴로 파고들어 상쾌함이 느껴졌다. 화방랑 꽃잎이 날리는 가로수 길을 달리는 그 순간은 한 쌍의 비둘기가 된 것처럼 자유롭고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얼마나 벌었어?”오토바이를 몰던 흐엉이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물었다.
“마사지 2회에 팁 6,000원을 받았어.”
“지폐교환은 많이 했니?” 앞을 향해 큰 소리로 라잉이 물었다. 바람 소리에 오토바이 엔진 소리에 말소리가 공기 중에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섞였으나 흐엉은 라잉의 목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많이는 못했어.”
아쉬움이 있는듯한 목소리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신이 난 흐엉은 "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주치는 바람에 그 소리는 흩날리며 다시 라잉의 귀에 모여들었다. 라잉도 소리를 질렀다. “야~ 신난다”
공원에 도착해서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둘은 함께 인근 편의점으로 가서 커피를 샀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흐엉은 지그시 라잉의 눈을 바라봤다.
“난 꼭 경찰이 될 거야”흐엉이 말했다.
“꼭 그랬으면 좋겠어”이 말을 하는 라잉의 얼굴이 상기되며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경찰이 되면 결혼하자던 흐엉의 말이 생각났다.
흐엉의 머릿속에도 경찰의 된 본인의 모습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라잉의 모습이 그려졌다.
공원 벤치에 앉아 데이트를 나누던 중 라잉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라잉~ 나 차우야! 잘 있었어?”고등학교 때 절친이었고 지금은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에 살고 있는 차우의 전화였다.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내고 있어?”
“그럼~ 나 지금 베트남에 와있어. 시간 되면 만날 수 있어?”
“그래 마침 오늘 일도 다 끝났는데, 오늘 저녁 6시에 다낭 대성당 앞에서 만날까?”
“좋아, 남편과 같이 갈게.. 그리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자. 내가 살게”
베트남 꽃등절(추석)에 차우가 남편과 함께 고향을 방문했다. 예전보다 얼굴이 더 하얘지고 머리는 목을 살짝 덮을 정도로 단발이었지만 볼륨파마를 하고 갈색으로 염색을 해서인지 도시 여자처럼 세련되어 보였다.
“신짜오..”베트남 사람과 거의 비슷한 발음으로 차우의 옆에 바짝 붙어있던 남편이 라잉을 보고 인사했다.
통통한 체형에 짧은 머리 스타일의 남편은 하늘색의 헐렁한 셔츠에 카키색 반바지를 입고 베이지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친구보다 나이는 12살이나 많았지만 친구와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았고 부부로서 서로 어울려 보였다. 친구 남편은 한국에서 제빵사라고 했다. 아직은 본인 가게가 없고 프랜차이즈 회사 직영 빵집에서 일한다고 했다.
“너는 한국 사람과 결혼할 마음 없니?”함께 밥을 먹던 중 갑작스러운 차우의 물음에 라잉은 많이 당황했다.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에서 사는 것을 많이 생각했지만 갑자기 물어보는 차우의 질문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한국에도 가고 싶었지만 그보다도 간호사가 되는 꿈이 먼저였고 흐엉과도 계속 사귀고 싶었기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한국에 가면 간호대학도 많고 간호학원도 많아” 라잉의 맘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차우가 간호사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라잉이 고등학교 때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몇 번 말한 적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 사는 것이 너무 낯설고 외로울 것 같아”
적극적인 차우의 국제결혼 이야기가 부담스러워 머뭇거리는 투로 말했다.
“한국에 베트남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임도 많아서 외롭지 않고 여기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야”
계속되는 차우의 설득에 한국 사람과의 결혼에 대한 생각이 비 온 후 죽순이 쑥쑥 올라오듯 어느새 라잉의 맘 한가운데로 쑥 올라왔다.
차우의 남편처럼 성실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한국 남자를 만나고 한국에서 간호사가 된다면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릴 수 있고 동생들 대학도 보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점점 라잉의 머릿속에 깊게 스며들고 있었다.
차우는 한국 부산에 살고 있다고 했다. 혹시 한국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남편이 만든 빵을 많이 주겠다고 했다. 군침이 돌았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빵처럼 풍미가 느껴지고 자석처럼 라잉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차우와 헤어지며 남편과 다정하게 손 잡고 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들이 떠나고 텅 비어 버린 골목길에서 행복의 향취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 향취에 홀린 듯 라잉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땡그랑 공사 가설재 파이프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크게 들렸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철거하고 소주 한잔 하러 가자”
종수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180cm를 넘어 보이는 큰 키에 군살 하나 없는 다부진 몸매, 완전 곱슬머리, 계란형의 작은 얼굴, 쌍꺼풀이 없는 큰 눈을 가진 종수는 거제에 있는 대형 조선소에서 가설재를 설치하고 해체하는 조선소 하청업체의 비계공이다.
한번 설치하면 오랫동안 유지되는 일반 건설 현장의 비계 설치·해체 작업과 달리 조선소 비계 설치·해체 작업은 건조 중인 배의 내·외부 도장이나 용접 등 작업공정에 따라 수시로 비계를 철거하고 설치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만큼 일도 힘들고 시간에도 쫓기고 비계설치 환경도 좋지 않아 위험하기도 했다. 종수는 그런 현장에서 5명의 인부를 데리고 작업 반장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있지만 친구들이 많고 술을 좋아해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고 41세인데도 장가를 가지 못했다.
그런 종수는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주위 친구들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걸 보고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형도 국제 결혼 해보세요”
2년 전 베트남 여인과 결혼한 상철이었다. 그 말이 종수의 말라버린 연애 감정에 단비가 내리게 했다.
“국제결혼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경비는 얼마나 들고?”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건반사처럼 바로 답변이 나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잖아요. 이번 주 토요일 제가 이용했던 부산에 있는 국제결혼 중개업체로 가요. 경비는 상담을 해봐야 해요”
동지를 만났다는 기쁨이 있었는지 상철의 얼굴이 상기되어 붉은기가 오르고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상철의 웃음소리에 홀린 듯 종수는 무의식적으로 가자고 약속을 해버렸다.
호찌민의 한 카페에서 종수와 라잉은 마주 앉았고 서로를 대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결혼 중개업체 직원이 앉아 있었다.
“신짜오”
베트남 말이라고는 인사말‘신짜오’밖에 모르는 종수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라고 천천히 라잉이 대답했다.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수줍은 듯 눈을 잘 못 마주치는 라잉의 모습이 종수의 연애 세포를 깨어나게 했다. 중개업체를 통해 3박 5일 동안 5명의 베트남 여성을 만날 계획이었지만 라잉이 종수의 마음을 휘잡아 버렸기에 다른 여성을 만나는 것은 시간낭비처럼 보였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어디에서 살고 있어요”
“거제에서 살아요”
“누구랑 살고 있어요”
“혼자 살고 있어요”
결혼 중개업체 통역 직원을 통해 간단하게 서로 몇 마디를 물어보았다. 연예 경험이 많이 없는 종수는 부끄러워서인지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라잉도 국제결혼을 위한 소개팅은 난생처음이라 어색해서 인지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으니 헤어지고 서로 마음이 있으면 내일 다시 만날게요.”
업체 직원이 만남을 마무리지었다.
결혼 중개업체 직원은 두 사람의 가족관계나 직업 등 간단한 인적사항을 서로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서로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하겠다고 했다. 라잉은 직원에게 동생들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보태주어야 하는 집안 사정과 한국에서 살게 되면 꼭 직업을 갖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종수는 직원의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두 사람은 다시 같은 장소에서 마주 앉았다.
종수는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술에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라잉에게 말했다.
“당신 좋아요. 결혼하고 싶어요”
국제결혼을 위한 만남이기 때문에 진행 과정이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성 발언에 약간 당황한 라잉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미소만 지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라잉은 연신 땀을 닦아내며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노력하는 종수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더듬더듬 질문을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티슈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라잉은 긴장으로 꼭꼭 닫힌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고 있었다.
종수가 자기에 비해 나이가 17살이나 많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수를 처음 볼 때부터 라잉의 마음이 설레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애정도 없이 나이 많은 한국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라잉도 그런 이유로 여기에서 종수와 함께 앉아있지만 다부진 체격과 외모, 안정적인 직업, 대화할 때 살짝살짝 웃는 모습에 국제결혼에 대한 경계가 풀려버렸다.
“베트남에 있는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내줄 수 있어요?”
3번째 종수와 만나는 날 라잉이 말했다.
“나 조선소에서 돈 많이 벌어요, 해 줄게요”머뭇거림이 하나도 없이 종수가 빠르게 답했다.
“한국에서 공부해서 간호사도 되고 싶어요”
“좋아요. 공부할 수 있게 도와 줄게요”이번에도 빠르게 답했다.
“고마워요”라잉은 말했지만 아직은 종수에게 완전히 마음을 주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라잉은 고민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까지 결혼 중개업체 직원에게 결혼 여부를 말해줘야 했다.
홀로 마당에 나와 하늘을 쳐다봤다. 은하수가 흐르는 선명한 밤하늘에 농사일로 시커멓게 그을린 부모님의 얼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동생들의 얼굴, 마사지 샵에서 지폐교환을 하고 있는 흐우의 얼굴이 뒤엉켜 함께 흐르고 있었다. 고민하는 라잉을 공감한다는 듯 선명하게 내리던 별빛이 어느 순간 흐려졌다. 라잉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기 때문이었다.
"종수와 결혼할게요"
다음 날 라잉은 종수와 결혼을 결정하였다. 바로 이어 베트남에서의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라잉의 집은 오랜만에 본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했고 문 앞엔 가지각색의 예쁜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전통 의상인 붉은색 아오자이를 입고 수줍게 앉아 있는 라잉의 모습에 종수는 흐뭇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결혼을 축하하러 온 라잉의 친구들 중에는 흐엉도 있었다.
“축하해”
웃음기 없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대답을 했지만 흐엉의 시선을 회피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흐엉과의 달콤했던 시간이 영화처럼 머릿속에 지나갔다.
흐엉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같이 걷던 길, 함께 오토바이를 타며 신나게 소리를 지르던 일, 흐엉이 라잉을 바라보며 웃음 짓던 맑은 눈망울이 떠올라 흐엉을 마주 보기 힘들었다.
라잉은 흐엉과의 기억을 잠시나나 잊기 위해 동생들에게 갔다.
“너희들은 대학에 꼭 가야 해 내가 학비 보내줄게” 활짝 웃으며 라잉이 말했다.
“안 보내줘도 돼. 내 학비는 내가 벌게, 언니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어린 동생들이었지만 국제결혼의 현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조금은 걱정하는 듯 또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첫째 동생이 말했다.
빨간색 아오자이 차림의 라잉의 어머니가 다가왔다. 웃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은 아닌 듯했다.
“잘 살아야 해.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라잉을 살며시 껴앉고 귓속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잘 살게”
대답은 했지만 자신감은 없었다.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를 뜨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매일매일 나를 사랑해 주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던 소소한 일상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생각과 거칠어지고 딱딱해져 버린 어머니 손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울컥했다. 부모님을 자주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한국생활의 불안함에 눈가에 이슬처럼 눈물이 맺혔다가 또르르 뺨으로 흘러내렸다.
흐느끼는 라잉에게 종수가 다가왔다. 라잉의 눈물의 의미를 안다는 듯, 살짝 미소를 띠고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다독였다.
“기쁜 날 왜 울어,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며 꼭 껴안아 주었다. 다시 한번 라잉의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히고 잠시 후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런데 라잉의 어머니가 껴안아 줄 때와는 다른 감정의 눈물이었다.
결혼식 다음 날 한국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매일매일 들락날락하던 황톳길 앞마당, 돌담 울타리, 담 너머로 보이는 계단식 논과 밭, 아침에 눈을 뜨면 들리던 가족들의 목소리가 이젠 더 이상 일상이 아닌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국 가서 연락할게”
라잉은 자기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재빠르게 눈물을 훔치고 웃음을 지으며 택시에 탔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멀어져 가는 가족들을 보며 그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한국으로 온 종수와 라잉은 거제에 있는 종수의 24평 아파트로 왔다. 깨끗하게 정리된 거실과 옷가지가 가지런히 걸려있는 작은방의 모습에서 종수의 성격이 깔끔하다는 느낄 수 있었다. 종수는 베트남 말을 하지 못했지만 라잉이 조금은 한국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상적인 생활을 위한 소통은 되었다. 그리고 지역마다 베트남 사람들의 SNS를 이용한 온라인 모임과 오프라인 모임이 있었기에 생활에 불편함이 크거나 외롭지 않았다.
“라잉!, 나 왔어. 오늘 너무 보고 싶었어”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는 종수가 잊지 않고 하는 말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라잉도 반갑게 화답했다.
꼭 껴안고 입맞춤을 하며 애정표현을 하는 종수가 너무 고마웠다. 하루 종일 집에서 베트남에 있는 친구들과 채팅도 하고, 한국 요리도 해보고, 한국어 공부도 하면서 분주했지만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하고 공허함이 있었는데 퇴근을 한 종수가 관심과 애정으로 채워주었다.
종수는 라잉을 많이 예뻐했고 라잉도 그런 종수가 점점 더 좋아졌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라잉의 배가 불러왔다.
“라잉 이젠 힘든 일 하지 마. 그리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자녀를 갖게 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던지 종수는 라잉의 배를 볼 때마다 어루만지며 싱글벙글했다. 라잉도 그런 종수의 모습이 좋았고 임신을 해서 더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길 기대했다.
“엄마. 나 임신했어”베트남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 그래 축하해.. 내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좋은 소식으로 전화통화를 하고 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울컥해졌다. 라잉 자신도 엄마가 되지만 그래도 엄마에게는 한없이 사랑받은 아이가 되고 싶은 본능적인 마음이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종수의 어머니는 종수가 열다섯 살 때 죽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형제자매는 없고, 아버지가 새엄마를 얻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거의 왕래가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딸만 셋이어서 화기애애하고 화목했던 라잉의 가족에 비해 가족사랑이 부족한 가정에서 어린 생활을 한 종수가 가끔 가엾게 느껴졌다. 아이를 임신하면서 부모의 사랑이 절실했지만 시부모의 사랑은 기대할 수 없고, 친정 부모님의 사랑은 거리의 벽에 갇혀 맘껏 받지 못하는 것이 라잉을 힘들게 했다. 그럴수록 더욱 의지하고 기대게 되는 사람은 종수였다. 그리고 종수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하얗게 덮인 12월 10일 라잉과 종수에게 예쁜 딸이 선물로 왔다. 민지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겨울 어느 날 아들이 태어났다. 민수로 이름을 지었다.
종수는 라잉에게 한 달에 100만 원의 생활비를 줬다. 베트남에서는 만져볼 수 없는 큰돈이었지만 베트남과 한국의 물가는 달랐다. 베트남에 30만 원을 보내고 나면 항상 생활비가 부족했지만 종수는 아껴 쓰라고만 했고 더 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라잉은 생활비가 부족해 베트남에 돈을 보내지 못했다. 부모님께는 미안했지만 아이들 기저귀, 분유값 때문에 여유가 없다고 전화로 말했다.
“괜찮아. 돈을 안 보내도 돼. 너만 잘 살면 돼”전화기 너머로 엄마가 말했다.
“죄송해요. 나중에 여유 생기면 보내드릴게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중이 언제가 될지 라잉은 알 수 없었다.
“무슨. 엄마가 더 미안해. 어릴 적 너희들 남들처럼 못 먹이고 못 입힌 것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 이렇게 잘 자라 주어서 고맙고 감사해. 이젠 우리들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살아. 응? 알았지!”
담담히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라잉의 눈물샘을 터트렸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자녀들에게 준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주지 못한 것만 생각하는 부모님의 사랑과 본인들도 못 입고 못 먹으면서도 자녀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파하는 게 라잉의 마음을 예리한 도구로 쿡쿡 찌르는 듯했다.
“다음에 또 연락할게”울먹이는 걸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말하고 전화를 서둘러 끊었다. 전화는 끊겼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평생 농사일을 해오면서도 목돈 한번 제대로 만져본 적도, 자기 땅을 가져본 적도 없는 라잉의 부모였다. 최근에야 베트남 경제사정이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가진 것 없는 시골 사람들은 여전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신세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라잉은 엄마의 괜찮다는 말이 더 가슴이 아팠다.
한국에 라잉을 데려오면서 라잉의 베트남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간호학원도 보내 주겠다고 흔쾌히 말하던 종수의 약속도, 변치 않고 사랑하겠다던 애정도 결혼생활이 흐르고 흐를수록 조금씩 변화했다. 술을 먹는 빈도가 늘었고 잔소리도 많이 하고 짜증도 많이 냈다.
서로 제대로 소통이 안돼 많은 대화를 하지 못했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종수는 사교성이 좋아 말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라잉과 대화할 때는 답답해서 소리만 지르다가 대화의 양을 줄여버렸고 덩달아 애정도 줄어들었다. 종수가 먹는 술의 양은 늘어났고 생활비는 줄어들었다. 술을 조금만 먹으라는 라잉의 말에 돌아오는 말은 무응답 아니면 짜증 섞인 말투로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라잉은 베트남이 생각나는 빈도가 부쩍 늘어났다. 가족들과 전화는 자주 하지만 속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안부 전화였다. 베트남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아이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라잉은 일자리를 알아봤다. 종수가 주는 생활비로는 아이들을 키우기에도 빠듯했다.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하고 본인도 간호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가끔 식당 아르바이트가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청소원을 모집한다고 온라인 베트남 모임에서 알려줬다.
신청을 했고 합격을 했다. 생각보다 급여가 많았고 교직원들도 친절하게 대해줬다. 특히 급식실에서 조리하는 직원들과 친하게 지냈다. 베트남 생활에 대해 관심도 많았고, 한국말도 가르쳐줬고 때로는 베트남 말을 배우려고도 했다.
베트남말을 가르쳐 줄 때는 이곳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한국에서 라잉은 나영으로 불렸다. 주민등록증에도‘이나영’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한국 이름을 만들었다.
라잉, 나영 발음은 비슷했지만 그래도 왠지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 나영으로 불리는 것이 그리 좋진 않았다. 라잉 이름이 좋고 이곳에서도 라잉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 모임에서 라잉으로 불릴 때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이 되었다.
청소원이 되어 종수가 주는 돈 보다 더 많은 돈을 스스로 벌 수 있게 된 라잉은 다시 꿈을 꾸었다. 베트남으로 보낼 돈도 조금씩 모을 수 있었고, 이렇게 몇 년만 더 하면 간호학원도 다닐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내심 기뻤다.
이런 라잉의 작은 기쁨이 고까웠을까.
“라잉 돈 얼마 있어? 돈 있음 나 좀 줘봐. 아 요새 일이 없어가지고..”
실실 웃으며 라잉에게 종수가 다가왔다.
청소원으로 일한 이후로 종수는 생활비를 주기는커녕 돈을 요구했다. 조선소 경기가 좋지 않아 일을 하는 횟수가 적어진 종수는 일이 없는 날에는 술을 더 많이 마시고 부족한 술값을 라잉에게 요구했다.
한 때는 멋지게 보였던 종수가 점점 싫어졌다. 종수를 떠나고 싶었다.
‘부산에 가면 숙식 제공하고 200만 원의 급여를 주는 식당들이 많다고 하던데 차라리 여기를 떠나 돈을 벌까?’
‘아니야. 애들은 어쩌고..’
종수를 떠나 돈을 벌어야 라잉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이제 갓 초등학생이 된 딸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걱정되고 불쌍했다.
저녁놀이 지고 점점 어둠이 내려앉을 때, 라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마음을 정리할 겸 혼자서 집 주변을 산책했다.
골목 끝에는 몇 년 전 이사를 가 지금은 비어 있는 집이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벽면을 담쟁이덩굴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라잉은 그 벽면에서 자기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담쟁이덩굴 같은 주위 환경에 자아도 정체성도 꿈도 희망도 다 가려져 버리고 진정한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담쟁이덩굴을 벗겨내듯, 라잉도 자기를 가리고 있고 답답하게 하는 상황을 확 벗겨버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다소곳이 자기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수줍은 듯 구름 속에 갇히고 고요한 적막의 밤이 시작되었지만 라잉의 마음속은 혼돈과 무질서의 밤이 시작되었다.
오만 생각을 잊고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단잠은 찾아와 주지 않았다.
“혹시 제가 없더라도 저희 아이들 잘 봐주세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퀭한 눈으로 학교에 출근한 라잉이 가장 자기를 예뻐하는 미경조리사님에게 말했다.
“왜? 어디 가려고”뜬금없는 라잉의 말에 미경의 눈이 커졌다.
“남편이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생활비도 주지 않아 속상해요. 결혼할 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남편에 실망을 많이 했지만 실망보다도 나를 무시하는 게 더 괴로워요. 한국말 잘 못한다고 대화도 하려 하지 않고 화를 자주 내요. 내가 한국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무시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인격도, 자존심도, 꿈도..
라잉은 미경에게 기대어 흐느껴 울며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애들도 있으니 조금만 참으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좀만 참아.”
미경은 라잉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참고 버티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었다. 또 라잉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 할지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설마 가출하겠어. 힘들어서 해 본 소리겠지’라고 생각하며 라잉의 말을 머릿속에서 애써 지우려 했다.
그런 일이 있은지 며칠이 지났다. 라잉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 미경도 안심하고 라잉이 잘 살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하나 둘 낙엽이 떨어지는 11월 초입 어느 날이었다. 흐릿한 날씨에 빗발까지 날리고 찬바람이 불어 쌀쌀했다.
종수는 아침 일찍 조선소에 갔고 라잉은 아이들 등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지야, 민수야! 오늘은 엄마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학교에 일하러 가지 않을 거야. 둘이 같이 학교에 갈 수 있겠지”
“어디에 갈 건데”민지가 말했다.
“부산에 있는 엄마 친구 만나러 갈 거야”
“언제 올 거야?”이번에는 민수가 물었다.
“내일 올 건데, 며칠 더 걸릴 수도 있어. 엄마 없어도 아빠 말 잘 듣고 누나랑 잘 놀고 있어”
“내일 꼭 와”표정이 그날 날씨처럼 어두워진 민수가 라잉을 꼭 안았다. 덩달아 민지도 라잉을 꼭 안았다. 라잉도 내일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만 하고 두 아이를 껴안았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울음을 참으면서..
“민지야 엄마 어디 가고 너희들끼리만 있어?”
퇴근 한 종수가 라잉이 보이지 않자 민지에게 물었다.
“부산에 있는 친구집에 갔다 온다고 했어. 내일 온데”
종수는 라잉이 전화를 받지 않고 라잉의 옷가지 등이 없어진 걸 확인한 후에야 라잉이 떠나버렸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아이 씨. 이 놈의 여편네가.”
종수의 입에서 짜증이 가득 담긴 욕이 나왔다. 몇 번이고 같은 욕을 지껄였지만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어디서 라잉을 찾아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소주를 몇 잔 들이켜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걱정이 꼬리를 물며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꿈처럼 희미하게 예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라잉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아이들을 낳았을 때의 기쁨,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던 라잉의 모습이 한 편의 흑백 영화처럼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눈물이 흐르며 흑흑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옆방에 아이들이 자고 있어 울음소리에 깰까 신경이 쓰였지만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가슴 깊은 곳 감정의 에너지가 모여 밀어내는 울음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라잉에게 많은 상처와 실망을 주기만 했는데, 그것들이 부메랑이 되어 종수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라잉이 너무나도 보고 싶고 그리워하게 되는 밤이었다.
“여기요. 테이블 좀 치워주세요”
“네”
“저기요. 불판을 갈아주세요”
“네”
부산에 있는 한 고깃집에서 라잉은 서빙과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이름을 잃어버린 채 여기요, 저기요 로 불리며 ‘네’만 반복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넓은 홀을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며 왔다 갔다 하면 다리도 아프고, 설거지에 손목도 욱신거렸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가끔 민지, 민수 또래의 아이들이 부모들의 손을 잡고 들어올 때면 그 아이들에게 시선이 고정되고 눈물이 핑 돌았다. 라잉에게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런 날에는 서빙을 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민지와 민수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식당에서 저녁 영업까지 마치면 저녁 10시를 전후에서 퇴근할 수 있었다. 반겨주는 사람 하나 없지만 라잉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피곤한 몸도 쉴 수 있었고 집에서는 라잉이 주인공이고 주인이 되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온기 하나 없는 텅 빈 박스 같은 숙소지만 라잉에게는 엄마 품처럼 포근하고 평안한 곳이었다. 욕실에 들어가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와 고단한 몸을 손바닥만 한 작은 방안에 눕혔다.
그런데 전등을 끄고도 잠이 쉽사리 들지 않았다. 소진되어 버린 몸의 에너지에 반해 정신은 아직도 잠을 못 들게 할 정도의 에너지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에너지는 이 방이 너무 적막하다는 것을 알게 했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듯 엄마 품에 꼭 안겨 잠들던 두 아이의 숨소리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집을 몰래 나오는 날 아침 학교를 가며 자기를 애처롭게 쳐다보던 민지와 민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엄마, 가지 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눈빛이, 대문을 나서며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희고 작은 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사랑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오다 내려가면 다시 베트남에 있는 부모님, 동생들, 흐엉, 친구들의 얼굴이 계속 뒤엉켜 떠올랐다. 그리고 하얀 가운을 예쁘게 입은 간호사가 되겠다는 꿈도 간절한 아쉬움이 되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꿈을 음미할 틈도 없이 흰 거품을 내뿜으며 흩어져 버리고 또 다른 이미지가 쏴아 하며 밀려왔다. 집을 나오기 전 산책할 때 보았던 이웃집 벽에 붙어있던 담쟁이덩굴이었다. 그런데 덩굴 앞에 종수가 있었다. 담쟁이덩굴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종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담쟁이덩굴 뒤에는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랑하는 사람들도, 라잉의 꿈도 장밋빛 미래도 있을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담쟁이덩굴을 걷어내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답답했다. 덩굴을 걷어내려 허둥지둥 계속 손을 뻗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신 그 손으로 덩굴 앞에 있는 종수를 꼭 안았다. 그러자 담쟁이덩굴 여기저기에서 달빛처럼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종수와 함께 그 빛이 있는 틈으로 좀 더 다가갔다.
온기를 머금은 보드라운 은은한 빛이 라잉을 감쌌다. 그리고 그 빛이 라잉을 스르르 잠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