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산 합장묘에서 친구를 그리워하며
어둠이 내려앉은 정명여학교 2학년 교실에 호롱불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교실 마룻바닥에서 이 학교 영어교사 성현과 음악교사 철민은 5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다.
얼마 전 양동교회 교인들과 3.1 운동을 주도했던 성현은 이번에는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다시 4.8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4월 8일에는 더 많은 학생들과 만세운동을 하려고 해”
어두운 교실 안 이었지만 성현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결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3.1 운동 이후 일본경찰의 감시가 더 심해졌는데 위험하지 않을까?”
어릴 적부터 성현의 절친이었고 성현을 따라 교사가 된 철민이 말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뜻을 존중하고 돕고 싶어”
성현은 강한 어조로 말을 했지만 태극기를 만드는 그의 손에 약간 떨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얀 천에 그려진 태극기를 작은 막대에 실을 꿰어 묶는 손놀림이 재빨랐다.
밤 10시쯤 200개의 태극기가 다 만들어졌다. 태극기를 보자기로 감싸며 성현이 학생들에게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내일모레 4월 8일 10시에 목포역에서 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우리의 독립 염원을 외칠 거야”
“네 저희들도 친구들과 그날 모이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요. 나라의 독립을 소망하는 저희들의 염원을 크게 외칠 거예요”
1919년 4월 8일 10시가 되자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현과 다섯 명의 여학생들은 빠르게 태극기를 싼 보자기를 풀어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모인 사람들 중 3분의 1은 정명여학교 학생들이었고 군중들의 맨 앞에는 성현이 있었다. 성현이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외치자 군중들이 따라 외치며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다.
파란 하늘아래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태극기를 더욱 펄럭이게 했다. 목포역 앞이 태극기의 물결로 가득 덮이자 만세운동의 분위기도 점점 더 고조되었고 함성소리도 더 멀리멀리 퍼졌다.
성현은 시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검정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행진을 했다. 그리고 그 뒤를 시민들이 이어갔다.
그런데 함성소리에 놀랐는지 어디선가 검은 제복을 입고 곤봉을 든 일본 경찰 무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외치고 흩어지세요”성현이 군중들에게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갈래 길로 흩어졌지만 성현과 철민은 학생들이 다 대피할 때까지 그곳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 학생들이 경찰에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고 있었다. 성현은 재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가 경찰을 밀어 제치고 아이들이 도망가게 했다. 하지만 성현은 일본경찰의 곤봉에 맞아 땅에 쓰러졌고 이어지는 발길질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함께 있던 철민도 경찰의 곤봉에 맞았고 둘은 경찰들에게 둘러 쌓여 어디론가 끌려갔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위협적인 목소리가 재소자들을 긴장하게 했다. 목포형무소 간수 이시로의 목소리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목포형무소에 수감이 되었다. 그들은 재판을 받으며 형무소 뒤편에 위치한 산정산에서 돌을 캐고 다듬는 일을 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돌을 캐러 산으로 올라갔다.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라고는 정과 망치였다. 큰 망치로 바위를 깨부수고 그걸 담장이나 주택을 만들기에 적당한 크기의 석벽돌로 다듬거나 조경석을 만들었다.
성현은 하루 종일 돌을 깼고 철민은 돌을 나르는 일을 했다. 일을 하는 중간중간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채석장이 시끄러웠고 감독하는 이시로가 잡담하는 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노는 모습을 보이거나 잡담을 하는 재소자들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로 크게 지껄였다. 욕인 것 같았다.
성현과 철민이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때는 점심시간이 전부였다. 점심이라고 해봤자 형무소에서 가져온 주먹밥에 소금에 절인 깍두기 몇 조각이 전부였다. 성현과 철민은 채석장 뙤약볕 아래에서 마주 앉았다.
계속되는 망치질로 힘이 들었는지 주먹밥을 들고 있는 성현의 오른손이 떨리고 있었다.
“재판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많이 지쳤는지 밥 먹을 힘도 없는 듯 주먹밥을 조금씩 천천히 씹고 있는 성현에게 철민이 물었다.
“내가 주동자여서 형벌이 클 것 같아. 지난 3.1 운동을 주동했던 것까지 포함해서 벌을 줄 것 같아. 그리고 일본 경찰들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죄를 더 묻을 거래”
그 말에 철민은 입에 밥이 들어가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동자는 5년 이상 중형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재판관에게 하고 싶은 말 했어?”
“빼앗긴 나라를 다시 돌려달라고 외친 게 무슨 잘못이냐고 했지”
성현은 힘없이 조용히 말했다. 자기에게 다가올 운명을 직감이라도 한 듯 슬며시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철민도 성현이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함께 쳐다봤다. 성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다 잘될 거야, 걱정하지 마’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전혀 성현에게 희망도 줄 수 없고 위로도 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성현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봄 하늘의 파란 하늘이 유독 선명하고 깨끗했지만 두 남자의 마음속 색깔은 잿빛으로 변하며 우울하고 슬퍼졌다.
“식사 끝 모두 제위치로 돌아가서 다시 하던 일 계속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이시로가 외쳤다. 주먹밥은 맛이 없었지만 쉬는 시간은 꿀맛 같았기에 한참을 머뭇거리다 성현이 천천히 일어났다. 채석장으로 가는 성현의 축 처진 어깨가 감당하기 어려운 인생이라는 짐을 겨우 겨우 지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4.8 만세운동 시 체포되어 형무소로 끌려온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모의를 하고 주동을 한 사람들, 적극적으로 3.1 운동에도 참여하고 4.8 운동에도 참여한 사람들, 단순 가담한 사람들, 이 중에서 단순 가담한 사람들은 재판 없이 훈방되었지만, 적극적 가담자와 주동자들은 재판을 받아야 했다. 철민은 적극적 가담자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성현은 주동자로 인정되어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만세운동 주동자들은 형무소에서도 다른 재소자들보다 힘든 노동을 하고 생활환경 및 처우도 좋지 않았고 고문도 있었다.
성현의 선고 이후 채석장에서 철민은 성현을 만났다.
“요즘 몸은 어때?” 평소 폐병을 앓고 있었기에 건강이 걱정되어 철민이 물었다.
“몸이 많이 좋지 않아, 다친 곳도 많고, 노동도 힘들고..”
“후회는 되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다시 같은 상황이 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애써 태연한 척하는 성현의 모습에 철민의 마음속이 아려오며 눈물이 올라왔다.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 다시 손을 흔들고 돌을 날랐다.
채석장에서 매일 보던 성현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왜 성현이 보이지 않나요?” 철민이 이시로에게 물었다.
“성현은 병동에 있다.” 웬일인지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시로가 말했다.
그 말에 철민의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이 텅 비어 버렸다. 너무나 고된 노동과 고문 후유증이 성현을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지치게 만든 것 같았다. 돌을 나르고 있었지만 몸만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아무 의식이 없었다.
조금씩 머릿속으로 슬픔이 스며 들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성현과의 시간들이 지나갔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일을 할 때도 성현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성현 때문에 4.8 만세운동에 함께 참여했고 형무소에 있지만 전혀 원망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힘내라고 빨리 일어나라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성현을 만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보슬비가 조용히 내리던 어느 날, 이시로가 철민을 포함해 3명의 재소자를 형무소 뒤쪽 산정산으로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땅을 파라고 했다. 그곳은 형무소에서 죽었지만 연고가 없는 사람들을 가매장하고 가매장한 주검이 많이 있으면 모아서 화장을 하고 다시 묻는 합장묘지였다.
이상한 기운이 철민의 목을 누르는 것 같았다. 50cm 정도 땅을 파내려 갔을 때 작업을 멈췄고 형무소 쪽에서 재소자들이 하얀 천에 쌓인 무엇인가를 수레에 실어 끌고 오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외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공포가 철민에게 밀려왔다.
“설마 시체는 아니겠지?”
잠시 후 설마 하는 생각이 현실이 되었다. 그 수레 위에는 한 구의 주검이 있었다. 천으로 싸였기 때문에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성현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구덩이에 그 시체를 던져 넣고 다시 덮으라는 이시로의 명령이 떨어졌다. 한 삽 한 삽 흙을 덮는 철민의 손에 경련이 일어났다. 살아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성현을 주검이 되어서 밖에 볼 수 없고 그 주검을 본인이 묻어주는 현실이 너무 이상했고 부정하고 싶었다. 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분명 꿈일 거야. 깨어나야지” 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두드렸지만 아픔과 함께 현실을 자각하는 행동밖에 되지 않았다.
이시로가 조용히 다가와 이 주검이 성현이라고 했다. 몸 상태가 매우 나빠져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철민을 찾았다고 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다 메꾸는 동안 정명여학교 교실에서 태극기를 만들던 비장했던 성현의 모습과 행동 하나가 그림을 보듯 머릿속에 자세하게 그려졌다. 귓가에는 4월 8일 목포역에서 군중들 맨 앞에 서서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성현의 피와 땀 그리고 주검이 결코 헛되지 않고 대한 독립의 열매가 맺히길 다시 한번 기도하며 마지막 한 삽을 떠서 매장지 위에 덮고 몇 번 쳐서 다졌다.
1년여 형기를 마치고 철민은 형무소를 나와 정명여학교에 복직되었다. 영어를 배우고 있는 교실에 가면 성현이 있을 것 같은 환상이 피어올랐다.
아카시아 향기가 진하게 코끝을 스치는 어느 날 형무소 뒷산을 찾았다. 성현을 묻은 곳에는 합장비가 세워져 있었다. 합장비에는 묻힌 사람의 명단은 없고 합장시기가 새겨져 있었지만 합장비를 보는 철민의 머릿속에는 성현의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들어왔다. 성현과의 추억이 생각났다. 성현과의 행복한 기억과 우정을 간직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또 그를 생각할 때마다 독립을 염원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철민의 마음에 전이가 되는 것 같았다.
다음 해 4월 5일 어둠이 내려앉은 정명여학교 2학년 교실에 작은 호롱빛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철민은 그곳에서 대여섯 명의 학생들과 함께 정성스레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다. 1919년 4.8 만세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교내에서 재현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던 뜨거운 성현의 마음이 철민에게 전이가 되어 1919년 4.8 만세운동은 그 의미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