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클락슨은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1에서 우승을 하여 가수로서 성공한다. 'Because of you'는 그녀가 정서적 돌봄을 받지 못했던 불우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작사한 노래이다. 이 노래에는 부모의 이혼 과정에서 방치되고 고통받던 어린 클락슨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나는 'Because of you'를 들었을 때 그녀가 매우 강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느꼈다. 좌절하거나 절망에 부서지지 않고 내면의 아픔을 노래로 승화하여 마음껏 표출하는 그녀가 무척 대단해 보였다.
켈리 클락슨과 달리 나는 엄마의 차별을 감내하면서 동시에 눈을 감고 그로부터 자유로운 척해야 했다. 편애와 차별을 대수롭지 않게 다뤄야 내가 받는 고통이 사라질 것으로 여긴 것이다. 엄마의 편파적인 말들과 행동을 참고 견디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넘겨버리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이 저 멀리 꺼져버릴 것 같았다.
'K장녀라는 말이 왜 나온 거겠어? 다들 이렇게 살잖아. 모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냥 그렇게 살잖아. 엄마 말처럼 그저 내가 예민한 거야.'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 대한 엄마의 공감능력은 더욱 나빠졌고 동생을 향한 편애는 날로 커져갔다. 엄마는 내가 가족을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할 때 그것을 알아주기는커녕 동생에게 해주는 것을당연하게 여기고 더 주었다. 나는 엄마의 감정과 욕구를 미리 알아차리고 채워주는 것으로 '좋은 딸'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했으나, 엄마와 동생은 그것마저도 '딸이니까, 누나니까, 여자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쯤으로 곧잘 정당화시켜 버리곤 했다. 가족 사이에서 내가 짊어진 희생의 의미는 온 데 간데 없어지고 혼자 힘으로 이뤄낸 성취마저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의 공헌으로 포장되었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간단한 일들도 늘 엄마에게는 공손히 또는 간절히 부탁해야만 했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주 큰 시혜를 베푼 것처럼 굴었다. 나는 답답함에 점점 숨이 막혔다.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어도 가슴에 응어리가 있는 것처럼 모든 숨이 무거웠다. 그 상황이 옳지 않다고 느꼈으나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적어도 엄마가 나와의 인연을 끊기 전까지는.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인연 끊음은엄마의 편애로 인해 곪아있던 삶의 상처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준 기폭제이자 탈출구가 되었다. 엄마의 인연 끊음을 매게 삼아 친정 엄마의 편애와 차별이 내 삶에 미친 악영향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나 또한 편애와 차별을 내 아이들에게 답습하고 있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엄마는 동생에게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아낌없이 주었고 동생은 자신이 받은 사랑 그대로 자기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내가 내 아이를 예뻐할 때도 그러면 아이가 버릇없어질 것이라고 나와 아이에게 쓴소리를 퍼붓던 동생은 자기 아이들에게는 야단 한번 치지 않고 무엇이든 오냐오냐 받아주는 한없는 사랑을 표현했다. 담배 피운 손으로 내 아이를 만질 때 먼저 손을 씻으라는 나의 요청에 '에이, 기분 더러워서 안 만져'라고 버럭 성질을 내던 동생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는 담배를 끊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최선을 다해 조카들을 양육했다. 그에 비해 엄마로부터 부스러기뿐인 찌꺼기 사랑을 받고서 그것조차 감사하여 몸 둘 바를 모르던 나는 그 편애와 차별이 뭐가 좋다고 내 아이들에게까지 물려주려 했다니 후회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주 어리석게도,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음에도 내가 받은 대우를 아이들에게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써온 나는 정말 바보였다.
그동안 친정 엄마의 편애와 차별을 수용하고 받아들였던 것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아마도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과 다투기 싫어서, 엄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나만 참으면 되니까 등의 온갖 이유로 불합리를 외면하고 나를 위해 싸우기를 진정으로 회피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일지라도 참고 견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내 삶을 위한 변명의 무게를 대신 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결국 자신의 몫으로 남게 되기 마련이다.
이제 나는 편애와 차별 속에 상처 난 마음을 회복하고 편애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 친정 엄마의 편애와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갈 것이다.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끊임없이 나의 고통을 되짚어보고 객관화하고 의미를 붙여 한 단씩 나아갈 길을 스스로 쌓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난한 감정의 고리를 수도 없이 톱질하고 깨부수려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비록 그 과정이 아프더라도 나와 아이들을 위해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삶은 투쟁이다.
아이들은 곧잘 아옹다옹 싸운다. 과자 하나를 내가 더 먹었니, 네가 더 먹었니, tv를 네가 좋아하는 것을 더 보았니, 내가 더 보았니, 엄마가 나를 더 안아주었다느니, 너를 더 안아주었다느니 등등 아주 사소해 보이는 몇 가지들이 다툼의 이유가 된다. 나는 그동안 아이들이 다툴 때 으레 큰 아이에게 모든 것을 참고 동생에게 양보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았던 것처럼 아이에게도 상처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하는 일은 재판정과 같이 변모하였다. 그리고 이 재판정에서는 누가 잘못을 했는지, 누가 잘했는지의 여부뿐만 아니라 누구의 마음이 더 아픈지 어떤 결과가 진행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의 다양한 각도의 분석과 결론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이 지루한 과정을 좋아했다. 서로의 입장을 들어주면서 각자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일을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결론과 관계없이 늘 다양한 화제가 갑자기 등장했고 어떤 놀이가 생겨났고 금방 사이가 좋아지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다툼이 지나가 버렸다. 참 이상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매번 그렇게 다투면 힘들지 않냐고 되물었고, 아이들은 말한다.
"엄마 나는 고양이고 동생은 강아지라서 서로 다투는 거예요. 고양이와 강아지가 사이좋은 것 봤어요? 그런데 같이 사는 고양이 강아지는 매일 싸워도 서로 사이가 좋대요. 우리도 그런 고양이, 강아지예요. 그래서 싸워도 금방 화해하고 또 같이 노는 거예요."
맞아, 너희 스스로 내는 그 결론이 옳은 것이야. 꼭 누가 희생하고 양보해야만 하는 게 아니었어.